피렌체 중심에는 멍 때리기 좋은 광장이 있다.
피렌체에 머무는 열흘동안 시뇨리아 광장에서 죽치고 앉아있는 날이 많았다.
멍~ 때리다가, 뭔갈 메모하다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보다 더 예술적인 광장이 또 있을까.
시뇨리아 광장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비롯해 도나텔로, 잠볼로냐 등의 조각상들이 있다. 원래 원본들이 이 광장을 지키고 있었지만 이제는 보존을 위해 그것들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속에 들어가고 대신 복제품들이 이 광장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
원본이 원래 위치해 있던 장소와 역사적 맥락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내가 보기에 이 광장의 복제품들은 원본과 동일한 위상을, 아니 어쩌면 더욱 값진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예컨대 다비드상의 원본은 시뇨리아 광장으로부터 10분정도 떨어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엄청나게 긴 줄을 선다. 그 이유는 원본이라는 단어가 갖는 아우라 때문에, 그러니까 순전히 기분탓 때문에 그럴 것이다. 만약 어느날 아침 아카데미아의 원본과 시뇨리아 광장의 복제상을 슬쩍 바꿔치기 해도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이 광장에는 조각상들이 즐비해 있어서인지 특히 그림그리는 학생들이 눈에 많이 띄는데, 르네상스의 후예답게 그 열기와 분위기가 어찌나 대단한지 저녁 11시가 넘어서까지도 조각상을 스케치하는 많은 그림쟁이들을 볼 수가 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나도 몇 점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면서 참, 목잘린 석고상들만 실내에서 죽어라 그렸던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리니 피렌체 미술지망생들 너네들 말이야 참 복받은거야.
이런 식으로 하루에 한 조각상을 보고 그렸다.
아마 60여일의 유럽 여행동안 스케치북을 꺼내고 그림을 그린 유일한 장소가 시뇨리아 광장이었을 것이다. 이 광장에서 한 시간만 앉아 있으면 뭐라도 꺼내서 뭐라도 적거나 그리게 된다.
@thelu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