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내내 흐리더니 저녁이 되자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도 오고 저녁도 아직 안 먹었겠다, 딱 전과 막걸리 한 잔이 머리에 떠올랐다. 망설일 게 뭐 있으랴. 곧 바로 실천으로 옮겨 동네 전집으로 향했다. 동네에는 꽤 오래돼 보이는 전집이 하나 있다. 다른 가게들, 하다못해 다른 막걸리집만 하더라도 학생이나 젊은 손님이 많은데 유독 이 가게는 어른들이 많이 찾는다. 위치가 번화가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서일까? 겉모습이 허름해 보여서일까? 어쨌든 젊음 특유의 왁자지껄함이 느껴지지 않는 한적한 곳이라 좋다.
역시나 비오는 날 먹는 전과 막걸리 한 잔은 꿀맛이었다. 어느 덧 비가 오면 막걸리와 전을 떠올리는 나이가 되었다. 나는 아직 충분히 어린데 어디서 나이를 먹은 것일까. 깔끔한 인테리어를 가진 팬시하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보다는 허름하더라도 제대로 맛있게 요리하는 가게가 좋아졌다. 왁자지껄 실없는 농담따먹기와 술게임을 하며 노는 것보다는 조용히 진솔한 얘기를 나누는 게 좋아졌다. 조금씩 내 관심사는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어린 친구의 관심사와는 달라졌다. 나는 그 나이를 이미 지났으니까.
비가 와도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늘 들떠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비가 왜 우울한 감정을 비유하는 대상으로 쓰였는지 알 것 같다. 계속해서 떨어져 내리는 끝 없는 하강.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나도 절로 내려 앉는 기분이다.
비가 올 때 막걸리를 먹는 이유는 이런 우울한 감정을 떨쳐 내기 위한 게 아닐까? 한 잔 정도 술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면서 약간은 흥분한, 들떠있는 상태가 된다. 심박수도 올라간다. 빗방울과 함께 아래로 떨어지던 기분이 다시 위로 올라간다. 비때문에 생기는 우울한 기분을 없앨 수 있도록 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유전자 속에 '비=막걸리'라는 공식이 새겨 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