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벨로타고 제주일주-10 서귀포
나약한 인간이 오늘날 지구의 패자로 군림하게 된 건 강한 적응력과 의지 때문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문명의 흥망성쇠를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이라는 인식으로 분석했다. 나라든 개인이든 어려움이 없다면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에 있고 어떤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적절한 응전을 통해 재미와 보람을 가지는 것이다.
자전거 수리
호텔로 돌아와 내가 타던 미니벨로 앞 핸들에 타이어가 망가진 J의 앞 휠을 묶고 삼천리자전거 대리점으로 갔다. 왕복 12km의 도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길고 가파른 언덕 두 개를 넘어야 하는데 길을 잘 몰라 카메라 가방을 가끔 열어 Navigation을 계속 확인해야 했다.
자전거 때문에 한라산을 거의 뛰다시피 내려와 바로 자전거를 몰고 나와 배도 고프고 심신이 모두 지쳐 있어 페달 밟기가 쉽지 않다. 호텔에서 목욕하며 편히 쉬고 있을 J를 생각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자전거 빌려 주었으면 됐지 수리까지 해줘야 하는지… 같이 오게 된 것도 아이러니 한데, 참 기구한 운명이다.
언덕을 넘어 5거리를 지나 삼천리 자전거 대리점을 발견했다. 내가 들고 온 18인치 휠을 보더니 주인이 대뜸 이건 안 된다고 단호하게 잘랐다. “아니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망연자실(茫然自失)하지 않을 수 없다. 목이 너무 말라 물을 한잔 얻어 마시고 왜 안 되는지를 물었더니 바람 넣는 꼭지가 달라서 안 들어 간단다.
“해봤어” 정주영이가 안 된다고 하는 직원한테 했다는 그 말이 목구멍 밑에 까지 올라왔다. 안 되도 좋으니 한번 해 보자고 사정조로 설득했다.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 있는 데서 땀 뻘뻘 흘리며 자전거 타고 왔다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안으로 들어 가더니 일반 자전거용 18인치 타이어와 튜브를 가지고 왔다. 보기에 조금 커 보이던 꼭지가 쑥 들어 갔다. 그 동안의 모든 걱정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닿칠 더 절망적인 상황을 예측도 못한 체…
자전거 수리 2
힘들어도 이제 됐다는 기쁨과 곧 목욕도하고 밥도 먹을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개선장군처럼 호텔로 돌아와 J앞에 가지고 온 휠을 던졌다. 바람이 하나도 없다며 다시 내게 전해 준 휠에는 정말 거짓말처럼 바람이 완전히 빠져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바람 넣는 꼭지에 붙은 무시고무가 삮아서 오는 중에 바람이 빠져버린 것이다.
전화를 했다. 6시 반 안으로 다시 가지고 오란다. 도저히 자전거를 타고 다시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J는 왜 그 놈이 잘못했는데 우리가 가야 하느냐고 가지고 오라고 호통을 치란다. 아무리 생각해도 돈(35000원)까지 다 지불한 상황에서 그 놈이 올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싸우다 퇴근해 버리면 모든 게 끝장이다. 지금 가니 기다리라고 하고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 다녔지만 택시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은 가고 초조해 졌다. 그런데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다. 빈 공터 같은 곳에 버려진 듯한 자전거 한대가 나둥거려져 있었다. 꼭지를 뽑아 보니 무시고무가 정상적으로 붙어 있어 가지고 호텔로 돌아와 타이어에 셋팅하고 휴대용 펌프로 바람을 넣었더니 잘 들어 갔다.
절망을 딛고 일어선 사람의 얘기가 큰 감동을 주듯이 우리에게 어려움이란 삶의 양념 같은 것이다. 간단히 목욕하고 식사하러 밖으로 나왔다.
정이가네
소한마리국밥(9000원)을 시켰다. 제주의 음식값은 서울을 능가한다. 10,000원 이하 음식을 찾는 게 힘들 지경이다. 그런데 이 식당 국밥은 너무 맛있어서 음식값이 아깝지 않았다. 너무 배가 고픈 이유도 있었겠지만… 몰래 숨겨온 고량주를 한잔 나누어 마셨다. 세상이 갑자기 아름답게 보이고 그렇게 미워 보이던 J도 측은 하게 느껴졌다.
어떤 하청업체에 있어서는 이사의 말 한마디가 회사의 존망이 걸릴 정도의 위엄이 있기도 하는데 지금은 만신창이 되어 나의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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