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집에 돌아왔습니다. 인터넷이 없는 환경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을 오랫동안 자랑으로 여겨 왔는데 집에 오자마자 스팀잇에 들어 오고, 마지막으로 글을 올린 것이 4일 전이라는 것에 마음이 급해져 얼른 글쓰기 버튼을 눌렀습니다. 사실 순례길 이야기를 가장 쓰고 싶은데... 이건 천천히 되새김하며 써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대신 ‘순대길’ 이야기를 쓰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순대를 만들고 지금 돌아온 것입니다. 저희 엄마의 친정이기도 한 춘천 큰이모댁에 다녀왔습니다. 가정에서 순대를 직접 만드는 것이 흔치는 않을 것 같은데, 외할머니께서 이북에 계실 때부터 대대로 만들어온 것을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큰이모가 해오시다가 이제는 제가 전수받게 된 것입니다. 전수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고 일손을 도와 드린 정도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순대 만드는 법을 무조건 배워 오라고 몇 년 전부터 애를 태우셨거든요. 춘천 순대가 좀 맛있습니다. 돈을 많이 준대도 비슷한 순대를 파는 곳이 없어, 하는 수 없이 만들어 먹는 것도 있습니다. 하는 수 없다고 한 것은 품이 여간 많이 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택이긴 해도 가정집에서 만드는 것치고는 꽤 본격적인 것이 돼지머리부터 돼지 피까지 모든 재료를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합니다. 허파와 간을 비롯한 내장과 소를 담을 소창, 대창을 밤새 찬물에 담그어 핏물을 뺍니다. 돼지머리와 내장은 된장과 각종 채소와 과일을 넣은 솥에 함께 삶고 소창과 대창은 소금, 밀가루로 박박 씻고 뒤집어서 또 씻고를 반복합니다. 돼지 선지는 핸드블렌더(도깨비 방망이)로 응고된 것을 풀어준 뒤 그 안에 속재료를 넣습니다.
큰 대야에 담긴 돼지 피 속에는 찹쌀(미리 익혀 넣기도 함) 이 들어가고 익힌 배추와 숙주 썬 것, 썬 대파와 쪽파, 간마늘과 생강 등이 들어갑니다. 소금, 후추, 간장, 참기름 등으로 간도 해주어야합니다. 그리고 돼지피와 잘 섞어주면 됩니다. 아, 순대 레시피를 쓰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아무튼 이 속재료를, 한쪽 끝을 실로 묶은 소창과 대창에 넣은 뒤 다른 한쪽마저 실로 묶어 삶아 주면 순대가 됩니다.
큰이모와 큰이모의 며느리(저는 언니라고 부릅니다), 저 셋은 돗자리 위에 앉아 손에 피를 흥건히 묻혀가며, 여기저기 튀겨가며 내내 순대를 만들었지요. 속재료를 준비하는 것이나 서서 일할 때는 문제가 없는데 얼음장 같은 물에 소창, 대창을 씻고 뒤집는 것과 목욕탕 의자 같은 것에 앉아 작업하는 것이 고되더군요.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일당 마이너스 백인 저희 엄마도 춘천에 함께 모시고 갔는데 우리도 안한 앞치마를 목에 거시고 쇼파에 우아하게 앉아 실을 한올한올 뽑아 주셨습니다.
핏물 빼기, 재료손질부터 이틀에 걸쳐 완성한 순대는 솥에서 삶는 중에 절반 가까이 터져서 큰이모부가 욕을 한바가지 잡수셨습니다. 솥 담당이셨거든요. (문득 솥밥님 생각이 납니다. 순댓국과 뗄 수 없는
님 생각도 나네요.) 대신 순댓국의 국물로 쓰일 육수는 일품이 되었습니다.
밤이 되어서야 순대 삶기가 끝나고 열심히 일한 우리는 윤기가 좔좔 흐르는 순대를 그 자리에서 바로 썰어 손으로 집어 먹었습니다. 씹을 때마다 고소하고 기름진 풍미가 뿜어져 나오는 돼지 대창과 함께 쫀쫀하게 씹히는 찹쌀, 따끈한 선지에 촉촉하고 신선한 채소...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어요. 염통은 또 얼마나 쫄깃하고 고소한지 어린 조카들이 머릿고기, 오소리감투와 함께 환장을 해서 먹었습니다. 정체를 알았으면 과연 먹었을까 싶네요. (송아지 고기라는 말에 속아 개고기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요즘 음식을 많이 못었먹는데 저야말로 내 창자가 순대인지, 순대가 내 창자인지... 할 때까지 쉴 새없이 먹었습니다. 왜 안배부르죠. 왜 안질리죠.
뜨거울 때 얼른 먹고 싶어서 사진을 이쁘게 찍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었네요. 글이든 사진이든 기록을 남기는 데만 급급.. 죄송합니다.
그리고 익일인 오늘, 망원동에 사시는 작은할아버지와 요양원에서 지내시는 외삼촌도 춘천 큰이모댁에 오셨습니다. 모시기 힘든 분들인데 순대 잡수러 오셨습니다. 일과 병환, 해외체류 등으로 오지 못한 친척들이 더 많았지만.. 가족을 한 데로 묶어준다는 것에 새삼 음식의 힘과 의미를 깨닫습니다. 가족을 위해 음식을 한 것인지, 음식을 위해 가족이 모인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으니까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 이북에서 피난을 오셔 자리잡아 벌써 4대의 추억이 깃든 춘천 집도 곧 팔리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사정때문이라 어쩔 수 없지만, 마치 우리들의 유년시절과 헤어지는 것 같아 무척 아쉬움이 듭니다. 그래서 이번에 만든 순대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이 순대가 뿔뿔이 흩어진 우리 가족을 한 데 모아주고, 이 음식 속에 우리의 추억과 역사가 계속 살아서 유산처럼 전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