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이라 스팀잇에 글을 쓰기가 싫었습니다. 불러낼 친구 하나 없어도 오늘만큼은 컴퓨터 붙들고 있는 대신 산책이라도 하러 나가고 싶었는데 말이죠.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또 집구석에 있었네요. 그래서 여행기 하나 쓸 시간이 충분히 있었는데도 쓰기가 싫었어요. 그래도 생일인데....
뉴욕에서 일했던 첫 레스토랑에는 손님들이 식사하는 자리가 메인 다이닝룸과 태번으로 나누어져 있었어요. 메인 다이닝룸은 예약이 필수였고 코스요리 정찬이 나오는 곳으로 정장을 갖춰 입는 것이 권고되는 반면에 태번은 좀 더 캐주얼하고 젊은 분위기로 예약없이 와도 바에 앉아 샴페인 한잔하며 기다리다가 자리가 나면 테이블에 가 원하는 메뉴를 주문하면 되는 곳이죠. 점잖고 우아한 다이닝룸도 나쁘진 않지만 활기찬 태번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나 더, 파티룸이 있어요. 따로 준비된 방에서 사적인 파티를 즐기는 단체 손님들을 위한 곳으로 한 손으로 가볍게 집어 먹을 수 있는 칵테일 음식부터 파티 메뉴를 따로 준비해 주지요. 보통은 런치서비스를 담당하는 요리사 중에서 저녁 파티음식을 준비하는데 그날따라 일손이 부족해 주방 디너팀 막내였던 제가 투입되었죠. 감자와 밀가루로 반죽해 튀겨낸 슈 속에 올리브를 갈아넣고 치즈를 뿌려낸 아뮤즈부쉬, 직접 훈제한 오리고기에 샐러리 잎으로 가니쉬해 꼬치로 끼워낸 것 등 열 몇가지의 한입거리 음식이 쉴 새 없이 나가고 나면 또 에피타이저가 서너개, 그 뒤로 연기로 익힌 뒤 껍질을 싹 제거해 빨갛게 피클한 양파를 얹어낸 송어요리, 진공포장해 수비드로 저온조리한 소고기 요리 등 메인 요리도 분주하게 지나가고 따뜻한 파이 위에 얹은 수제 아이스크림 등 두세 개의 디저트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게 누군가의 생일파티를 정신없이 치뤄내고 퇴근했을 때 이미 제 생일은 지나 있었죠. 얼른 집에 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는데 옆 동네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단짝이 또 다른 요리사 친구를 불러 내 한인타운으로 우리를 데려가 기어코 제게 생일 케익 한조각을 먹이던 기억이 납니다. 단짝은 이제 둘째를 임신한 애 엄마지만 내일 청와대 점심에 초대를 받았다고 하고, 다른 친구는 한국의 미슐랭 레스토랑 셰프가 되었네요. 저는 자랑스러운 스팀잇 슈퍼뉴비K..
다음날 레스토랑에서 저녁서비스를 위해 주방에서 프랩을 하다가 다함께 직원식사를 하러 홀로 나갔는데 테이블 위에 웬 커다란 생일케익이 있더랍니다. 누가봐도 레스토랑 페이스트리 식구들이 만든 것이었어요. 자기 생일에 얼굴도 모르는 남의 생일파티를 준비하느라 하루종일 고생한 저를 위한 것인 줄 알고 무척 감동을 받았는데, 제 생일 다음날이 바로 총주방장 생일이었던 것이지요.
▲하필 내 생일 다음날 생일이었던 총주방장
앞서 글에 잠깐 언급했던대로 어제는 친구의 가족들과 하루를 보냈어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두시간쯤 떨어진 교외에서 고기를 굽고 수영을 하고 와인을 마시며 유유자적 휴일을 보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도 친구가 어제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아! 라고 하는 걸 보니 보람이 있습니다. 저도 초대받아 간 입장에서 보람이라고 하기 좀 애매하긴 합니다만.. 사실 어제 친구 가족이 모인 것은 겸사겸사 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저를 위해 특별히 바베큐를 연 것이고 생일케익에 선물까지 준비해주었어요. 아... 그런데 저는 정말 피곤했어요. 일단 이 곳에서 마지막 남은 일요일 낮을 친구 가족과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왠지 부담스러웠어요. 저는 국립미술관을 한가롭게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었거든요.
저에게는 이 곳에서 가족과 같은 분들인데 문제는 제가 그들의 대화에 낄 수가 없어요. 몸은 피곤하고 스페인어는 들리지도 않고, 고마우니 미소는 잃지 않아야 하고.. 저를 정말 사랑해주는 분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앞에서 비키니 입고 물놀이하는 것도 편하지만은 않더랍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뻗어서 새벽에 일어나 글 하나 쓰고 다시 자서 오후 4시에 일어난 것을 보면, 정말 피곤했던 모양이예요. 그런데 다들 즐거웠다고 하니, 그래 다행이다.. 싶은 것이 보람이 있네요. 고마운 건 물론이고요.
그래서 결국에는 이 곳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생일 날 아무일이 없는 것도, 아무것도 안하는 것 티내는 것도 싫었는데 말이죠. 코인 하락장에 많은 분들이 글 쓸 의욕을 잃으신 것 같아 코알못이라 하락장 무서운 줄 모르는 저라도 뭔가 이렇게 주절 거려 봅니다. 이렇게 포스팅 하나라도 더 하면 스팀잇 활성화에 도움이라도 될까 해서.. 그러니까 아직 못하신 분들은 어서 제 생일 축하해주세요 ㅋㅋㅋ
한창 글 마무리 하고 있었는데 룸메이트가 저녁식사 예약시간 다 됐다고 보채서 결국 다 못 쓰고 밥 먹으러 갔다왔네요. 누구를 위한 저녁식사인가... 여러모로 보람있는 하루가 되었습니다. 생일 축하해주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제 곧 따뜻한 봄이 올 거예요 :-)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springfie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