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에야를 제대로 먹어본 건 뉴욕에 있을 때예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일을 할 때였는데, 캐비어에 트러플, 푸아그라... 각종 최고급 재료만 골라 고급 음식을 만드는 우리들의 식사는 매일같이 흰밥에 닭고기였습니다. 닭고기라고 하니 호사스럽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양념이나 튀김옷도 없이 아무렇게 토막 내서 오븐에 구운 걸 1년 내내 먹자니 닭 냄새도 맡기 싫어졌어요. 우리는 일하느라 바쁘니 직원 식사를 담당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그는 요리사가 아니었다는 게 함정. 게다가 워낙 바쁘게 돌아가는 주방이다 보니 따로 앉아 먹을 시간도 없지요. 서서 후다닥 먹고 다시 일해야 합니다.
일하기 빡세기로 유명한 레스토랑이었기에 모두 그러려니 했는데 이 직원식사를 너무나 괴로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요리사 페란 아드리아의 수제자로 우리 레스토랑의 오너셰프가 스페인에서 스카웃해온 수셰프였습니다. 그는 단지 직원밥이 자기 입맛에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이 형편없는 음식을 먹어야한다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자신이 직원식사를 만들겠다고 소매를 걷은 것입니다. 남들은 귀찮아서 피하는 수십명의 직원식사를 수셰프가 맡겠다니 특별한 경우지요.
그가 만든 직원식사가 바로 빠에야였습니다. 사실 너무나 럭셔리한 빠에야였죠. 레스토랑의 온갖 비싸고 신선한 재료를 다 갖다 썼으니까요. 그렇다면 빠에야가 무엇이냐? 빠에야는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유래한 쌀 요리로, 쉽게 말해 큰 팬 위에 여러 재료와 생쌀을 넣고 육수로 자작하게 끓여서 눌러먹는 밥입니다. 주로 해산물 빠에야, 발렌시아 빠에야(닭고기가 들어감), 먹물 빠에야 등이 있습니다. 닭갈비나 즉석떡볶이 먹고 나서 밥 볶아 먹는 거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빠에야는 무조건, 무조건입니다.
위는 빠에야의 본고장인 발렌시아(스페인 동부, 바르셀로나 아래) 에 가서 먹은 발렌시아 빠에야입니다. 오직 빠에야를 먹기 위해 발렌시아에 갔고, 거기서 하루종일, 삼시세끼 빠에야만 먹었어요. 아, 오늘은 뉴욕 레스토랑 주방에서 빠에야 해먹은 이야기를 하기로 했지요.
아무튼 우리는 저녁장사를 위해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이 스페인에서 온 수셰프는 신이 나서 빠에야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준비해놓은 재료를 다 갖다가 쓰는 겁니다. 랍스터와 랑고스틴을 이용해 만든 소스라든지, 살아있는 게 수십마리를 통째로 몇 시간동안 우려낸 육수라든지, 이쁘게 다듬어 놓은 각종 채소 등등 저녁장사를 위해 작업한 재료들을 마구마구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써야할 가스불과 플란차에는 그의 빠에야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그는 온 몸으로 빠에야를 젓지 말고 팬에 뚜껑을 덮지 말라는 제스츄어를 취했지요.
그렇게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 없는 빠에야가 탄생한 것입니다. 평소에는 직원 식사가 나오든 말든 관심없던 사람들이 그 날따라 긴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냄새만 맡고도 이건 놓칠 수 없다는 걸 예감한거지요. 빠에야는 완성 되자마자 사라졌습니다. 오늘도 닭고기에 흰 밥일 줄 알고 느즈막히 나타난 몇몇 직원들은 자신들의 몫을 남겨두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The Best Paella Ever. 제 생애 최고의 빠에야였습니다. 뉴욕 한복판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요리사들이 한 목소리로 그의 빠에야를 칭송했지요. 깊고 청량한 바다 위로 스페인의 땡볕이 쏟아지는 맛이었어요. 겉은 부드럽고 속은 꼬들꼬들한 밥에는 해산물의 진한 풍미가 배여, 한 숟가락 먹을 때마다 황홀했습니다. 그 날 식사시간에는 웬일로 모두가 일을 잠시 멈추고 앉아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어요. 그리고 다음 번 그 수셰프가 한번 더 빠에야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우리는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우리가 준비한 재료 다 쓸 거잖아... 그날 최고의 빠에야를 먹은 뒤 우리는 미친듯이 일을 해야 했던 겁니다. 그가 가져다 쓴 재료만큼 다시 준비해야 했으니까요.
왜 갑자기 빠에야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 순례길에서 빠에야 만들어 먹던 것이 생각나서입니다. 그 때도 스페인 친구가 신이 나서 만들어 주었거든요.
<순례길의 어느 완벽한 하루> https://steemit.com/camino/@springfield/daily-3 참고.
그래서 사실은 그가 만들어 준 빠에야 레시피를 쓰려고 해던 건데 서론이 너무 길어져서 서론만 쓰고 말았습니다. 중간에 글 제목도 바꿨네요. 짧게 쓰려고 노력하는데 맨날 이렇게 주절대고 있습니다. 그래도 읽어 주셔서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