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내가 한국에서도 이렇게 살 수 있을까

springfield(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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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추천한 '효리네민박' 이라는 프로그램을 뒤늦게 보고 있다. 제주도의 노을과 바다는 아름다웠고, 잔잔히 깔리는 음악과 출연자들의 대화도 차분한 위로가 되었다. 속도와 언성을 높이지 않아도 되는 여유와 너그러움을 느끼고 있으니 마음이 편했다. 내가 지금 이 곳에서 누리는 일상과 닮아 있었다.

손님 하나가 이효리에게 30대 여성을 위한 조언을 구했더니 제주에서도 마음이 지옥인 사람이 있다고, 어디에 있든 만족하며 살면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치 제주도에 살면, 지금 있는 곳을 떠나기만 하면, 모든 게 다 행복해질 것만 같은 사람들에게 나도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한때 유행했던 '헬조선'이라는 말이 너무 싫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며 불행을 자처하고 남을 탓하기만 하는 이들의 모습에 이상하게 화가 났다. 한국의 사회구조를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처음부터 날 위해 만들어진 낙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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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생각보다 더 보잘 것 없고 나약해 환경의 영향을 받고야 만다. 바퀴벌레가 득실대고 녹물이 나오고 매일같이 하수구가 막히고 온종일 캄캄한 오래된 집에 살다가 햇볕이 들고 환기가 되고 수압도 좋은 깨끗한 새집에 오니 일상이 완전히 바뀐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인생이 바뀌어 가는 것처럼.

우선 해가 드니 아침에 일어나게 되었다. 빨래가 잘마르니 세탁기도 돌리고 환기가 잘되니 청소도 자주한다. 하수구가 막히지 않으니 설거지나 샤워도 순조롭고 바퀴벌레가 없으니 마음놓고 요리한다. 햇살이 내리쬐는 거실 식탁앞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바닥에 요가매트를 깔고 스트레칭도 한다. 그날그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요즘은 아주 오랜만에 피아노를 치고 있다. 전에는 집이 싫어 밖으로 도느라 지출이 잦았지만 이젠 하루종일 집에 있어도 참 편안하고 좋다. 잠들기 전에는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책을 읽는다. 사놓고 몇년동안 펼쳐보지도 못했던 책들이다. 사실 한국집에 비하면 불편하고 부족한 것이 셀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더 나은 걸 안다고 해서 이 행복이 가치없는 것이 아니다. 이게 2017년 하반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나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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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가 한국에서도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작년 봄, 처음으로 타지생활에 지쳐서 잠시라도 정착해보자는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갔는데 처음 두달 너무나 괴로웠다. 관심인지 습관인지 모를 사람들의 질문과 참견, 온갖 걱정을 폭우처럼 맞고 있노라니 점점 오한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들처럼 살지 않는다는 불안과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 거다. 한국인으로서, 30대 여성으로서, 요리사로서, 자식으로서 내 역할을 다하지 않는 나는 틀려먹은 사람이었다. 마치 정신병원에 있는 것처럼,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모두 나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처럼 살아야 하는 건지, 어느 누가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 그들과 나를 분리하면서부터다.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30대 여성, 동종업계,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속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외국에 있을 때처럼 잠시 머무는 관찰자가 되어 그곳만이 주는 풍경과 에너지에 집중하니 오히려 그 어디보다 한국이 편하고 좋았다. 아마도 얼마남지 않았을, 부모님과 부대끼며 보내는 하루하루가 감사했고, 익숙한 사람들, 언어, 음식, 풍경 하나하나가 귀하디 귀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폭우 속에 떨고 있던 내게 큰 우산이 되어주었던 건, 불안하고 무겁고 죄송스런 마음을 겨우겨우 숨긴 채 제가 어떻게 살면 좋으시겠어요? 라고 여쭤보았을 때 뭘 그런 걸 묻냐는듯 니 마음대로 살아라? 라고 하셨던 아빠의 한마디였다. 대수롭지 않은 척 알았다며 방에 들어와서는 밀려드는 안도감과 고마움에 펑펑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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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학습의 부족으로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거나 아주 교만하지 않고서야 남에게 본인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누가 아무리 요란하게 오지랖을 부려대도 정작 나를 가장 걱정하는 것도, 가장 사랑하는 것도 나 자신이며 나는 나대로 살아도 되는 존재라고... 우리는 소란한 가운데,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