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제 전공에 대한 것들도 써볼까 합니다. 짧게 쓰려고 했는데 길어졌네요. 스토리텔링이 뭔지 궁금하신 분은 한번 쯤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95년작 뮤직 비디오 On Your Mark.
이 작품은 우리가 익히 보던 헐리우드 문법과는 많이 다르고, 뜬금없이 이야기가 반복되며 끝나기 때문에 당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감동을 주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죠. 처음 봤을 당시에는 On your mark (제 자리에) 뜻과 같이 반복하는 식으로 짰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구조에 대한 열쇠가 풀리게 됬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작품을 동양의 한시에서 나온 4장 구조 기승전결로 짰던 겁니다! 영상 스토리텔링을 기승전결로 짜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네요.
뮤비를 먼저 보고 싶으신 분은 맨 아래 해석 부분에 링크해 두었습니다.
스토리텔링이란?
먼저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개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토리텔링은 Story + Tell + ing의 합성어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야기를 구성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나리오에서는 스토리와 스토리텔링을 다른 개념으로 바라봅니다.
스토리 : 시간의 순서대로 나열된 이야기
스토리텔링 : 이야기를 구성해 더 효과적으로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
옛날 옛적에~ 로 시작하는 우리가 어렸을 적에 들었던 동화들은 대부분 시간의 순서대로 나열된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주인공이 태어나는 것이고, 모든 이야기의 끝이 주인공이 죽는 것이라면 이야기의 교훈을 전달하는데 굉장히 비효율적이겠죠.
그래서 언제부터 인가 사람들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탄생과 죽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의 욕망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입니다. 주인공이 어떤 욕망을 가졌는가에 따라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입니다. 인류의 관심사가 영웅의 일대기에서 개인의 욕망으로 변했다고 볼 수 있겠죠.
이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2000년 전에 쓴 시학입니다. 헐리우드는 바로 이 시학에 나온 주인공의 욕망을 다루는 3장 구조(설정-대립-해결)을 채용해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죠.
3장 구조의 비율은 1:2:1입니다. 이것은 (기)(승전)(결)의 구조와 비슷합니다.
기승전결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의 구조를 정리할 때 동양에서는 기승전결(起承轉結) 형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이 발전합니다. 이러한 구성은 한시에서 문학으로 뻗어 나가 우리가 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감이 안 잡히는 개념 중 하나입니다. 처음에 배울 때는 저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러다가 주인공의 욕망의 관점에서 보다 보니 이러한 구조가 짜여진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기(무대 설정 및 주인공의 욕망 설정, 발단)
인물, 사건, 배경 많이 듣던 이야기죠? 기(起)에서는 세계관을 정한 뒤 주인공이 '강렬히 원하는' 무언가를 설정해줘야 합니다.
승(욕망을 이루기 위해 행동, 전개)
욕망이 생겼으니 그것을 얻기 위해 행동해야겠죠?
-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욕망을 이루기 위한 선택은 다르겠죠.
전(그것이 너무나도 어려움, 위기)
하지만 그것을 이루기가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 승에서 선택한 행동의 인과관계에 따른 '위기'가 나타납니다.
- 인과관계에 따라 밤에 라면을 먹었는데 자동차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는 될 수 없죠.
결(그것을 이루거나, 실패함. 그로 인해 교훈을 얻음, 결말)
주인공이 그것을 이루거나, 이루는 것을 실패할 경우 이야기는 '끝났다'라는 느낌을 주게 됩니다.
주인공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고, 그로 인해 어떤 현상이 나타났으며, 어떤 결말이 있었는가로 교훈을 주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서양의 3장 구조, 동양의 4장 구조 모두 일맥상통합니다.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통했던 인류의 보편적인 이야기 만능키라고 할 수 있죠.
데츠카 오사무 - 만화 그리기 ABC 중에서
기에서 할아버지는 손자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욕망)
승에서는 손주랑 놀기 위해 박수를 치며 뒤로 점프를 하며 갑니다. (행동)
전에서는 그 '행동'에 의해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위기)
결에서는 그것을 보고 손주가 박수를 치며 좋아합니다. (결말)
할아버지가 원했던 것은 손주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죠. 그리고 결론에서는 손주가 즐거워합니다. 할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졌고 우리는 이야기가 끝났다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놀라운 일이죠!
스토리텔링에서 결(結)은 무척 중요합니다. 모든 주제와 교훈은 이 결론에서 나오기 때문이죠. 스토리텔링은 어쩌면 이야기를 끝내기 위한 예술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On your mark의 구조 해석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온 유어 마크의 구조를 분석해 봅시다.
기에서는 주인공이 원하는 게 생기고 - 소녀를 날려 보내고 싶다.
승에서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고 - 소녀를 구출해서 도망친다.
전에서는 위기가 다가오고 - 자동차에 사고가 생긴다.
결에서는 그래서? - 소녀를 날려 보내 줬는가?
이렇게 해석을 하면 뜬금없는 흐름속에 3가지 멀티 엔딩이 보입니다.
기(무대 및 욕망 설정 - 소녀를 날려 보내고 싶다.) 부분이 끝나면..
첫번째 엔딩은 기-결 (1:37 | 바로 날려준다. 하지만 이야기가 되지 못함.)
두번째 엔딩은 기-승-결 (4:30 | 3명이 함께 죽는다. 현실적인 상황.)
세번째 엔딩은 기-승-전-결 (6:00 | 가장 완벽한 이야기의 구성이자 이상적 결말.)
미야자키 하야오는 앞의 두 결말을 이야기가 되지 못하게 만들어 세 번째 결말로 관객을 밀어붙였던 것입니다. 구조를 통해 자신의 이상적 세계를 강력하게 어필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저 대단한 연출력을 가진 감독이라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언젠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1995년 옴진리교 사건의 피해자들을 만난 르포 형식의 인터뷰집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이 뮤직비디오가 만들어진 이유기도 했죠. 옴진리교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에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언더그라운드'와 가해자들을 인터뷰한 '언더그라운드2 - 약속의 장소에서'를 리뷰할 때 다루겠습니다.
@socob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