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snownoon(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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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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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첫 영화 1987.

영화는 사람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시대의 이야기다. 누군가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모두의 이야기다. 캐릭터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역사의 이야기다.
이야기의 구조 역시 다큐에 가깝다. 특정 인물들이 특정 사건을 만나고 극복하고 이겨내는 과정 보다는 87년이라는 시대를 그저 침착하게 관통할 뿐이다.
어벤저스급 배우들이 출연하지만, 이들은 모두 조연일 뿐. 딱히 누구 하나 주연이라 부르기도 애매하다. 87년은 그런 해였다. 모두가 함께하는 시대,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하던 시대 말이다.

택시운전사에서는 송강호가 모든 이야기를 끌고 간다. 평범한 택시기사가 불의한 시대와 만나는 과정, 외면하지 못한 양심, 외국기자를 도와 위기를 극복하는 역경, 끝내 비디오 테잎을 가지고 탈출하는 영웅적 서사까지. 반면, 1987은 다르다. 소시민인 류해진 가족의 서사가 일부 있긴 하지만, 오히려 대척점의 안기부 일당도 만만치 않게 부각된다. 오히려 류해진 가족과 안기부 일당의 부각이 전체적인 다큐적 흐름을 살짝 방해하기도 한다. 류해진 누나의 캐릭터는 어설프고, 갈등하는 박희순은 지나치다. 김윤석과 김태리는 캐릭터의 구현 방식조차 30년전으로 회귀시킨다. 직선적이고 단순하다. 김윤석은 변호인의 곽도원이 부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절대악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김태리의 각성은 80년대 영화 '파업전야'류에서 보여왔던 노동자들의 각성에서 한발자국도 못나갔다. 영화 엔딩에서 버스위로 올라가는 김태리 역시 레미제라블의 오마쥬라기보다는 성급한 상상력의 부재일 뿐이다.

30년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흐름은 역시 예나 지금이나 위세가 등등한 안기부. 30년 전 고문과 폭력에 저항했던 시대가, 30년 후엔 댓글과 불법에 맞서 싸우고 있다. 눈물을 흘리며 영화를 보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눈물나는 현실이다. 캐릭터도, 현실도 여전히 87년과 17년이 맞닿아 있다. 우리가 청산해야할 적폐는 87년부터 켜켜이 쌓여져 있는, 오히려 그날의 승리로부터 만들어진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그날 박종철 열사가 목숨을 걸고 숨겨왔던 선배 박종운은 훗날 한나라당에서 박근혜와 한솥밥을 먹고, 첫보도를 한 중앙일보의 기자는 박근혜 정부의 홍보특보 역할을 한다. 역사의 민낯은 적폐가 되어 태연하게 시대와 조우한다.

그래서 역사의 이력, 사람의 이력이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무게가 있다. 이력(履歷)의 '이'가 '신발 이' 字라는 점은 무척 흥미로운 부분. 영화의 중요 모티브인 이한열 열사의 신발은 그래서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시대를 외면할 수 없었던 청년이 걸어왔던 삶이기 때문이다. 2015년에는 이한열 열사의 타이거 운동화 복원작업이 진행되었고, 또 소설가 김숨은 "L의 운동화"라는 작품을 통해 그 의미를 되짚기도 했었다. 履歷은 신발을 신고 걸어온 역사다. 김태리 역시 잃어버린 신발 한짝 대신 이한열로부터 신발을 얻으며 각성의 길을 걷게 된다.
반면 반대편에는 양주가 있다. 박정희가 죽는 그 순간까지 시바스 리걸을 마셨다는 일화처럼, 하정우든 김윤석이든 그들은 늘 양주를 마신다. 하정우는 압수한 양주를 가지고 다니며 마시고, 김윤석은 문성근과 양주를 마시며 그들만의 대한민국을 주무른다. 후에 하정우가 양주병을 소각장에 버리며 "소주 마시고 살지 뭐"라고 하며, 변호사 개업 후 실제 대포집에서 소주를 마시는 장면은 그래서 매우 인상적이다.

신발과 양주 외에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마이마이와 선데이 서울이 있었다. 마이마이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는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 혼탁한 시대에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그저 모든 것이 두렵고 그래서 더욱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선데이서울은 대표적인 3S 정책 일환의 상징. 어둡고 답답한 시대에 기댈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성적 욕망이라도 한껏 끌어올리는 일일 뿐. 그래서 이 욕망은 엔딩 크레딧에 올라가는 '그날이 오면'과 무척 대비된다. '그날이 오면'은 민중 가요 중에서도 손꼽히는 고급진 노래. 대학가 노래패들의 노래나 군가풍의 행진가들이 주류였던 시절, 노래집단 '새벽'이 만들어낸 매우 고급진 노래다. '그날이 오면'은 진지하고 무겁게 자리를 일어나는 관객들에게 질문한다. '그날'이 왔냐고.

마지막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명장면.
설경구가 성당 담벼락에 매달려 스태인드 글라스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와 오버랩되는 장면. 설경구가 인류를 구원한 메시아도 아니며, 민중에게 기적을 선물하는 예수는 더더욱 아닐테다. 그러나, 87년에 자신의 삶을 기꺼이 투신한 모든 이들이야말로 오히려 시대의 예수인듯, 스테인드 글라스 넘어 들어오는 역광의 찬란한 빛줄기는 그들의 수고에 기꺼이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이한열이 쓰러지는 장면. 강동원이 열연한 이 장면은 너무나 생생하고 현실적이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 기술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명제를 가장 잘 보여준 사례. 놀랍도록 일치하는 싱크로율, 마치 1987년 연세대 앞 시위 장면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던 생생함이야말로 다큐스럽게 진행되어온 영화를 가장 극적으로 완성시켜준다.

이 놀라운 영화를 만든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2017년에 1987년을 다시 생각하며, 30년의 세월을 되돌아 본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으며,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역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되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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