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남은 자들의 몫이다. 어떠한 역사는 남은자들에 의해 기억되고, 어떠한 역사는 남은자들에 의해 잊혀진다.
2009년 고려 대학교 심재철 교수님은 1987년 당시 20세 이상이었던 사람 100명에게 한 가지 조사를 했다.
1987년 당시 이휴 였던 사건들을 나열하고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을 체크하게 했고 상위권에 랭크된 4가지 가 다음과 같다.
1988년 올림픽을 제외하면 모두가 '특정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마 그당시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바로 박종철 사건 이다.
지난 주 '박종철 탐사 보도와 6월 항쟁'의 저자이자 전 동아일보 논설 주간이신 황호택 고문님의 강연을 다녀왔다.
오늘은 지난 주 황호택 고문님의 강연을 다녀와서 느낀 점과 황 고문님으로 부터 들은 그 당시의 생생한 이야기들을 포스팅 해보려고 한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의 장충체육관 투표 장면>
1972년 10월, 유신헌법 아래에 ‘통일주체국민회의’ 라는 헌법 최고 기구가 창설되는데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수장은 현직 대통령이며, 국민의 투표로 회의의 대의원들을 선출하였다.
전체적인 구조와 방식을 본다면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른 제도였다.미국의 선거인단 선출은 선거인단이 자신의 지지정당을 밝힌 뒤 국민이 선출하는, 사실상 간선제의 모습을 한 직선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경우에는 대의원으로 출마하는 후보가 자신의 지지정당을 밝힐 수 없다. 따라서 이전까지 활발히 정치 성향을 표현해 온 사람들의 입후보를 배제했고, 거의 모든 출마후보들은 친 정부 성향의 지역 유지들이었다. 야당인사들의 출마는 사실상 원천봉쇄 되었다. 모든 입후보자들이 여당 후보를 지지하는 어느 누가 선출되어도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같은 선거라는 의미이다.
서울 장충체육관에 대의원들을 모아 선거를 진행하였는데, 후보는 고(故)박정희 대통령으로 단일후보였다. 지금처럼 표기된 이름에 도장을 찍는 방식이 아닌, 종이에 직접 후보자의 이름을 기재하는 방식이었다. 참여한 2,359명의 대의원 중 두 명은 후보자의 한자를 잘못 기재해서 기권 처리 되었다. 나머지 2,357명의 찬성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황호택 고문님에 따르면 이 당시 모든 것이 오픈되어 있었기에, 반대를 던질 수 있는 투표권자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반대를 했다가 걸리면 엄청난 고문과 수모를 당해야 했기에..
<부산 시청 앞 계엄군>
야당인 신민당 전당 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에 선출되었고 이후, 김영삼 총재직 정지, 의원직 박탈,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66명 전원 사퇴 제출 등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10월 15일에 민주 선언문이 배포되고 반정부 시위가 전개되었다. 대학생과 시민들이 유신 정권 타도를 외치며 방송국을 점령하고 세무서 등을 파괴하는 등 강력한 시위를 벌이자 정부는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들을 진압하였다. 19일에는 시위가 마산, 창원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나 군대의 출동으로 진압되었다.
황호택 고문님은 강연에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계엄 군들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훈련 받은 군대가 아닙니다. 그들은 적진에 침투하여 적들을 교란하고 무자비하게 살상하기 위해 훈련받은 군대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대가 일반인들을 상대로 투입되었으니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현장검증>
부마민주항쟁을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방식을 놓고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더욱 커지던 와중에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의 만찬 도중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발터 PPK 권총으로 저격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1)김재규는 애초부터 민주주의에 관심이 많던 사람으로, 본인 스스로 법정에서도 밝혔듯 독재국가로서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거사했다는 설이다. 이 설에 의하면 애초 유신독재가 시작될 무렵부터 김재규는 박정희에 대한 미련을 접었는데, 그렇게 계속 망설이며 세월이 흐르던 중 부마민주항쟁이 터지고, 대응방식에 있어 박정희가 온건파인 자신보다 강경파인 차지철의 손을 들어주자 국가 규모의 큰 혼란이 올 것을 우려해 거사를 실행했다는 것이다.
(2)차지철과 갈등을 빚던 김재규가 차지철을 제거하면서 박정희도 같이 살해했다는 설. 이 시기 차지철과 김재규의 상호견제는 극에 달해있었는데, 이러한 암투 속에서 박정희가 차지철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자 결국 자신이 밀렸다고 판단한 김재규가 10.26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차지철은 성격이 안하무인이라 박정희의 총애를 받자 경호라는 본연의 임무를 넘어서서 기타 영역에까지 손을 뻗치는 월권 행위를 일삼았는데, 이에 김재규 등 측근들이 차지철의 월권을 경계하는 충언을 했지만 그때마다 박정희는 차지철을 오히려 두둔했고, 도리어 차지철 앞에서 김재규에게 면박을 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차지철의 횡포는 더 심해졌고, 때문에 거사했다는 것. 이는 과거 그의 제자였던 이만섭이 추정하는 설이기도 하다.
당시 김재규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부마항쟁을 전국의 대도시로 뻗어나갈 가능성이 높은 민란으로 파악하여 박정희에게 보고했지만, 박정희와 차지철은 북한 간첩 또는 김영삼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불순한 사건으로 호도하고 대량 학살을 예고하는 언행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또 역사속 무서운 말이 하나 나온다.
"캄보디아는 킬링필드라면서 3백만을 죽였는데, 우리야 1~2백만 죽인다고 해서 뭔 일 있겠습니까?"
12.12사태는 당시 전두환, 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 후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군 내부 개혁을 진행하자 신군부는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을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하여 군권을 장악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해 사건(10.26)의 수사 총 책임을 맞고 있던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으려 했으나 실패하자 총격전까지 벌이며 이들을 강제 연행했다. 전두환은 군사를 이끌고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전사령부 사령관, 자태완 수도겨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했다. 이 사건으로 최규하 전 대통령은 실권을 잃고, 1980년 8월 16일 하야했다.
황고문님은 이때의 이야기 역시 굉장히 생생하게 들려주셨는데, 이런 표현을 하셨다. "여러분들은 지금 민주주의가 썪어가는 과정을 듣고 계신 것입니다."
12.12사태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민주주의 와는 거리가 먼 독재 정권이 이었다. 이에 나라 곳곳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회장이었던 박종철 군도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1987년 1월 14일 경찰 수사관들에게 연행되어 대공분실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박종철은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당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월 15일, 박종철의 사망을 알리는 기사가 올라온다. 1월 16일 치안 본부장 강민창은 기자회견에서 박종철의 쇼크사를 공식 표명한다.
"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역사속의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부검의의 증언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과 고문근절 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의혹과 분노는 쉽게 수그러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유튜브에는 아직도 박종철 사망사건의 단신보도 영상이 있다.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박종철군(21·서울대 언어학과 3년)이 이날 하오 경찰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경찰은 박 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박 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 학교 측은 박 군이 3~4일전 학과 연구실에 잠시 들렀다가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고 밝혔다. 한편 부산시 청학동 341의 31 박 군 집에는 박 군의 사망소식을 14일 부산시경으로부터 통고받은 아버지 박정기 씨(57·청학양수장 고용원) 등 가족들이 모두 상경하고 비어 있었다. 박 군의 누나 박은숙 씨(24)는 지난해 여름방학 때부터 박 군이 운동권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 최근 무슨 사건으로 언제 경찰에 연행됐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박 군은 토성국교·영남중·혜광고교를 거쳤으며 아버지의 월수입은 20만 원으로 가정 형편이 어려운 편이다.
박종철 사건 1보가 터지면서 국내 모든 언론사엔 비상이 걸렸다. 기자들은 곧바로 확인 취재에 들어갔다. AP와 APF 등 통신사들이 서울발 긴급기사로 중앙일보를 인용해 박종철의 죽음을 타전했다.
중앙일보의 보도가 있은뒤, 15일 오후 6시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박종철 사망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이 나왔다.
“밤 사이 술을 많이 마셔 갈증이 난다며 물을 여러 컵 마신 뒤 심문 시작 30분 만에 수사관이 책상을 ‘탁’치며 추궁하자 갑자기 ‘억’하고 쓰러졌다.”
경찰은 박종철의 사망원인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쇼크사)라며 수사 과정에서 가혹 행위를 철저하게 은폐했다. 또한 정부는 경찰의 공식 발표에 맞춰 이 사건을 사회면 2단 크기로 보도하라는 ‘보도지침’을 언론사에 전달했다.
하지만 경찰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축소는 동아일보 기자들의 용기로 조금씩 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동아일보 사회부장은 “대학생이 고문 받다 죽었는데 이런 보도지침이 무슨 소용이냐!”고 외치며 보도지침이 적힌 칠판을 박박 지운다. 정권의 보도지침을 무시하고 진실을 밝히겠다는 상징적 장면이다.
한겨례와의 인터뷰를 보면 당시 부검의에 대한 정부의 압박을 잘 알 수 있다.
강민창 본부장과 박처원 5처장 등 경찰 간부들이 저한테 공식 부검서에는 심장 쇼크사로 적으라고 압박했지요. 저는 질식사라는 것을 검찰에서 이미 적어 갔기 때문에 거짓말할 수가 없다고 버텼지요. 그래도 이들은 막무가내였어요. 강 본부장은 국과수 소장한테 둘이 목욕이나 하라면서 100만원이 든 봉투를 건넸어요. 문을 나가는 저한테 ‘당신 은혜는 잊지 않겠다’고 말하더군요. 저녁 먹는 자리에까지 치안본부장의 한 참모가 와서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면서 또 쇼크사로 하자고 요구하더군요.”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부탁, 아니 강압을 이겨낼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싶다. 그리고 다음 대답이 내 가슴을 울렸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 스승이 늘 그랬지요. 부검 잘못해서 사인을 틀리게 하면 부검의를 그만둬야 한다고 말입니다. 또 언젠가는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계획이 있었는데, 명백한 사실을 바꾸는 불명예스런 일을 해서는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최환 공안 부장의 인터뷰 내용 역시 놀랍다.
당직이 없으니 사무실에 있던 저한테 치안본부(경찰청의 옛 이름)의 대공 수사관 2명이 찾아왔어요. 이들은 A4 용지 2장짜리 ‘변사사건 발생보고 및 지휘품신서’를 들이밀고는 ‘수사받다가 학생 한 명이 죽었는데 화장 처리를 하려고 하니 허락해달라’는 거예요. 직감적으로 고문받다가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젊은 사람이 갑자기 죽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 놓고는 이 사람들이 증거를 없애려는구나 짐작했지요. 그러나 속생각은 묻어놓고 ‘고문한 것 아니냐’고 떠봤더니 예상대로 ‘절대 아니다’라고 펄쩍 뛰더군요. 그래서 고문을 안 했으면 아무 문제 없는 것 아니냐, 내일 아침에 정식으로 변사 사건으로 처리할 테니 내일 오라고 했지요.”
내가 그랬죠. 당신들도 아이들이 있을 텐데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봐라, 서울로 유학 보낸 아들이 하루아침에 숨졌는데 어느 부모가 자식 얼굴도 안 본 채 화장해도 좋다고 하겠느냐고 말했죠. 그랬더니 고개를 떨구더군요. 이들을 보내놓고 혹시 싶어서 시신 보존 명령을 내렸죠.”
최환 공안부장과 황석준 부검의는 직업 의식이 옳은 일을 하도록 했다고 하지만 내가 황고문님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이들은 단순히 직업 의식을 넘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들어간 행동이었다. 그가 진실을 밝히기 까지의 과정, 그리고 받은 수많은 압박들을 들어보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황고문님께서는 책에 직접 싸인을 해주시며 이런말을 해주셨다.
잊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고맙다...? 왜 황고문님이 고마우시지...? 책을 받고 와서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얻은 결론.
당시 희생된 사람들은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형, 누군가의 동생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아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아들을 잊지 않아줘서 고맙다고 표현하신 것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 강연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고문님은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싸운 다는 것이 나가서 경찰들과 싸운다는 것만을 의미 하지는 않지요? 기자는 기자의 윤리의식에 입각해서 진실을 알리는 것이 싸우는 것이고, 부검의는 의사의 윤리의식에 입각해서 진실을 알리는 것이 싸우는 것이지요. 우리들도 계속해서 싸울 수 있습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역사를 잊지않고 진실을 밝히려 한다면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정말 머리가 띵해지는 한마디 였다. 고문님께서 거리에 나가서 싸우지 않으셨다는 말을 듣고 약간 실망하려는 찰나에 들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6.29 선언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지 30년이 지났다. 그 사이 여러명의 대통령들을 거쳐갔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유례없는 국정농단 사태 부터 최근 들어 나오고 있는 MB의 문제들...이러한 일들은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고 민주주의의 위기는 계속해서 나올 것이다.
하지만 크게 걱정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제2의 최환 공안부장, 제2의 황적준 부검의 들이 많다. 위기가 찾아오고 그들에의해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욱 강해지고 있다.
6월의 항쟁은 실패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한, 영원한 성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P.S 황호택 고문님에게 선물 받은 책을 다 읽고 이에 대해 좀더 심도있게 다시 포스팅 하고싶다.
<참고자료>나무위키, 한겨례, 선거관리 위원회 및 뉴스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