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기자인 척]불만분자 연대기(5)-또다시 내근을 시키면 사표를 내겠다

shiho(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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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국제부 발령은 일종의 좌천성 인사였다. 편집부에서 3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사회부로 나왔는데 7개월 만에 다시 내근직으로 발령이 나 버렸으니까. 인사를 낸 국장은 내가 내근을 얼마나 지겨워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국제부는 7명이었다. 부장과 국장급 선임기자, 부장급 전문기자, 차장과 차장급 기자, 나와 1년 선배로 구성돼 있었다. 하지만 이 중 기사를 쓰는 사람은 사실상 셋 뿐이었다.

부장은 원래 기사를 쓰지 않는다. 차장은 국제부에 처음 온 우리에게 조금 빠듯한 업무 오리엔테이션을 하고는, 자신은 내일모레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한다며 일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와 동기인 차장급 선배는 약 10개월 뒤 부임하는 베이징 특파원에 사실상 내정된 상태고, 차장이 워싱턴 특파원이 돼서 떠나면 보직차장을 맡을 예정이었는데, 일은 젊은 연차 기자들처럼 의욕적으로 했다.

나와 1년 선배는 부서에서 막내들이기 때문에 매일같이 지면 대부분을 메꿔야 했고 가끔 돌아오는 주말자 기획이나 돌발업무도 당연히 우리 차지였다. 일을 많이 함은 두말 할 여지가 없었다.

선임기자는 선임답지 못했고 전문기자는 전문성이 없었다. 선임기자는 나름 특정국 전문이라며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연재로 일주일에 한 면을 메꿨는데, 회사에선 그만하면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이 호봉에 따라 최고액 연봉을 받으면서 야근도 적게 하고, 휴일 근무도 안 하고, 지면에 기여하는 바도 작아서 안 그래도 쥐꼬리인 회사의 호봉순위 최하단에 있는 젊은 기자들이 더 많이 야근하고 더 많이 일해야 했다. 야근비, 휴일수당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모를까.

전문기자는 아침발제부터 형편없었다. 매일 각자가 3~4 꼭지는 발제해 줘야 부장이 어느 정도 킬하면서 지면계획을 짜는데, 항상 한 꼭지를 그것도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기사를 발제했다. 그 정도 기사는 우리가 할 일 다 하고 연합뉴스 우라까이 해서 올려도 되는 수준이었다. 그는 가끔 차례가 돌아가는 주말자 기획을 맡겼더니 얼마 전 중앙일보에서 쓴 기획을 거의 그대로 베껴서 올려 놓기도 했다.

부장보다 선배인 두 사람은 시간이 남아도니 앉아서 사적인 통화를 사무실이 떠나가라 하질 않나, 아재개그에도 못 미치는 허접한 농담을 뱉어 놓고 시시덕거렸다. 회사 전화와 회사 컴퓨터, 회사 프린터로 근무 시간에 사적인 업무를 하다가, 일이 잘 안 풀리면 내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정색하고 거절할 수도 없어서 그냥 나도 할줄 모른다고 했다.

추한 모습도 많이 봤다. 점심 때 어디서 술을 먹었는지 오후 내내 먹은 것들을 확인(?)하느라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냄새를 피운 적도 있었다. 한번은 무슨 실수를 했는지 마감시간도 되기 전에 퇴근을 해버렸는데 떠난 자리에선 지독한 냄새가 풍겨 왔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젊어서 회사에 헌신했던 선배들이 편하게 회사 다닐 수 있게 해 줘야 한다'는 당시 국장과 회사의 기조는 젊은 기자들(어쩌면 나 혼자)을 더 화나게 했다. 당신들이 젊은 시절에 기자의 위상이 어땠는지, 정부기관지 기자로서 당신들이 어떻게 일했는지 얼마나 받고 다녔는지를 잘 아는데 헌신이니 희생이니 운운하는 것이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내근은 지독하도록 찌질하고 치사했다. 나는 당시 나온 지 얼마 안 된 카카오톡 PC 버전을 통해 애인(지금 아내)과 연락도 하고, 동료들과 회사 험담도 하고, 옆자리 1년 선배랑 뒷얘기도 하고, 당시 하고 있던 게임(클래시오브클랜) 단톡방에서 수다도 떨었는데 누가 내 컴퓨터에 띄워져 있는 카톡창들을 보고 부장에게 뒷담화를 했나보다. 부장은 나한테 직접 말을 못하고 선배한테 얘기를 했고 선배는 그 말을 나한테 전해줬다.

참 웃겼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채팅 창을 한번 열면 닫지 않는 성격이라 대화가 없어도 열려있는 창이 많았다. 내가 채팅을 한 것이 주변사람에게 무슨 피해를 줬는지 모르겠고, 업무에 무슨 지장을 줬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부서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축에 들어있었고 한 번도 채팅을 한답시고 일에 있어 실수를 한 적도 없다. 단지 채팅 창이 많이 열려 있다는 이유로 지적을 하기엔 자신들도 켕기니까 그렇게 뒤로만 얘길 한 거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10만원 상당의 정보보호 필름을 구해서 모니터에 덮었다.

내근은 찌질하기 짝이 없었지만 당시 옆자리였던 1년 선배는 엄청 열심히 일하고 깔끔하게 기사를 쓰고 마감도 빨리 해서 나 같은 후배에게 큰 교감이 됐다. 그리고 선배들 흉도 많이 보고 개인적인 고민도 많이 털어 놨다. 선배 없었으면 내근을 어떻게 했을까 아찔하기도 했다.

차장급 선배도 매일 면톱거리가 될 만한 발제를 하는 본보기를 보여줬다. 노조위원장 출신으로, 그가 위원장을 할 때 나는 집행위원이었다. 항상 입에 욕을 달고 있어서 인기는 별로 없지만 일을 잘했다. 내 기사 데스킹을 정말 잘 봤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내근은 정말 다신 하고싶지 않았지만 국제부에서 기사 쓰는 틀 하나는 잘 잡고 나온 것 같다. 편집부에서 3년 내내 기사를 안 써 보다가 사회부에서는 힘든 취재와 기사쓰기를 병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국제부에 오니 취재를 할 일이 별로 없이 외신에서 팩트를 챙겨 기사쓰는 연습을 주구장창 할 수 있었다. 기사를 잘 쓴다는 소리는 못 듣고 못 쓴다는 소리는 일부 이상한 사람들에게서 가끔 듣긴 하지만 지금 이정도 쓸 수 있는 건 국제부 경험 덕분이다.

2014년 하반기에 정치적인 문제로 회사가 또 한바탕 시끄러워졌다. 당시 국장처럼 또 사주조합장이 편집국장이 되려 하는 문제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노조는 이런 폐단이 다신 없어야 한다며 사장과 협의해 편집국장 임명 관련 규정을 개정하려 했고, 당시 사주조합장은, 내가 보기엔 자신이 편집국장을 하고 싶은데 뜻대로 안될 것 같으니 온갖 추잡한 방법으로 회사를 흔들다가 급기야 해임됐다.(그는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진 뒤 사장이 바뀌면서 완전복귀, 그 뒤 두 차례 편집국장 선거에 나왔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2014년 11월 국장이 또 바뀌었다. 사장이 후보 2명 이상을 지명한 뒤 편집국원들이 투표로 뽑는 지명선출제 방식으로 편집국장 선출 제도가 바뀐 뒤 처음 국장이 된 사람은 나를 대학 후배라며 많이 아껴주던 선배였다. 인사를 낼 테니 소원수리를 내라기에 '경찰팀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근은 이제 기자 인생에서 두번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웬걸 나를 경찰서가 아닌 경찰청으로 보내버렸다.

그렇게 경찰기자 경력 7개월 뿐인 기자가 경찰팀 넘버2인 '바이스'를 하게 됐다. 바이스를 하면서 넘버1인 캡을 두명 겪게 됐는데 한 명은 절대선, 한 명은 절대악이었다. 절대악으로 불리는 한 명은 후일 '시호와 OOO이 주먹다짐을 했다더라'는 헛소문의 주인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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