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랫동안 어깨를 짓누르며 점점 다가오던 기획이 드디어 코앞에까지 왔다. 기획 좀 쓰려고 일부러 아침 발제를 살살 했다. 순전히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나한테만 일이 몰리고 맨날 기사가 커져서 숙제를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또 순전히 혼자만의 느낌일지도 모르는데 모두가 발제를 살살했다. 이럴 때 발제를 받는 부장들의 행동은 크게 네가지다.
- 그대로 편집국 회의에 들어가 "쓸만한 발제가 없어요"라고 배짼다.
- 전화를 들고 발제가 부실하다며 각 팀장을 깬 뒤 몇십분 내로 추가발제를 지시한다.
- 본인이 발제를 한다.
- 아이템을 주고 발제를 시킨다.
우리 부장은 4번이었다. 나름 훌륭한 부장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 그 아이템이 보통 나한테 돌아오기 때문에 오늘 발악을 했다. 그 일로 후배들과 넋두리하다가 재밌는 부장들의 특징이 보였다. 바빠 죽겠다면서 이 포스팅을 할 수 있게 된 이유도 아래에 나온다.
부장 : 요건 C(막내급)가 하도록 하자.
C : 부장 저는 어제 시키신 이것도 있고 그제 시키신 저것도 있고, 수요일까지 마감해야 하는 그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것도 절 시키시면 물리적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부장 : 그래? 그럼 D(또다른 막내급)랑 같이해.
C : 아니 두명으로도 부족합니다. XX팀 사람도 나눠주세요.
부장 : 허허 그래? 알았다...
부장 : 내가 어제 저녁자리에서 이런 얘길 들었는데, 이게 최근 이런 사건 때문에 나왔다는 거야. 요거 오늘 하나 씁세. 이걸 언넘이 어떻게 했고 정말 효과가 있는 건지 체크해 주면 될 듯.
S : 근데 거시기는 언제 론칭하나요. 1회 데스킹 끝났던데 저는 2회 진도를 거의 못 나갔습니다.
부장 : 허걱. 올린다고 하지 않았나.
S : 마무리하겠다고 선언한 지난주에 업무량 폭발...
부장 : ㅋㅋㅋ 백퍼 책임 통감한다. 담주 월욜 론칭 목표. 아직 시간 있으니 차분차분 해서 담주 화욜꺼정은 올리삼. 음하핫.
S : 뉍
부장 : 오늘 자료들은 별 것 아니니 내가 안에서 정리하겠다. 거시기에 올인하삼.
S : 뉍
A부장과 B부장의 결정적인 차이를 한 마디로 말하면 뭘까.
A부장은 무식한 거고 B부장은 무서운 거다.
A부장은 뭔 일이 터지면 무조건 막내를 시켜 왔다. 막내 한 사람에게 어떤 일들을 얹어 놨는지 기억도 못하면서 새로운 일거리가 생기면 막내를 다 시킨다. 막내가 죽어라고 일해서 빵꾸를 안 내니까 모르는 거다. 얼마나 과부하가 걸려있는지.
그래서 참다참다 막내가 악 소리를 낸다. 그럼 그 때라도 얼마나 힘든지를 헤아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또다른 막내급을 하나 더 붙여 준다. 이런 경우 대체로 그 또다른 막내급도 거의 똑같이 부하가 걸려 있다. 어깨에 일더미를 잔뜩 짊어지고 있는 둘이서 또 죽어라고 일하는 거다.
부장은 맘이 편하고 위에 수두룩한 선배들은 검나 한가할 거다.
B부장은 누구에게 얼만큼의 일더미가 쌓여 있는지 다 안다. 부장이 궁금한 건 '이놈이 견딜 수 있는 용량은 얼만큼인가', '요놈의 한계는 어디인가'다. 그래서 모두에게 일거리를 차곡차곡 쌓아 준다. 부원들 모두 일거리를 잔뜩 짊어지고 있다. 그런데 부장은 앞에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을 또 툭툭 던져 준다. 부원들은 일을 짊어진 채 앞에 놓인 일들을 우선 처리한다.
부장은 어떤 넘이 먼저 비명을 지르는지, 어떤 수준으로 얼만큼 해낼 수 있는지를 파악한다. 그러다가 악 소리를 내면 검사는 끝난다. 부원들은 부장이 판단하는 각자의 용량에 맞는 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용량은 부장의 기준일 뿐. 모든 부원은 선후배를 불문하고 그 부장을 벗어날 때까지 악 소리를 내기 직전의 강도로 일하게 된다.
눈치들 채셨겠지만 B부장은 우리 부장이다. 존경할지언정 좋아하기엔 너무 무섭다는 걸 자주 느낀다. 그는 부원이
비명을 지를 때 뭘 던져줘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ㅋㅋㅋ 백퍼 책임 통감한다'
이 말은 'ㅋㅋㅋ 너의 용량은 이정도구나'로 번역하면 될 것 같다.
'오늘 자료들은 별 것 아니니 내가 안에서 정리하겠다. 거시기에 올인하삼'
이 말은 '니가 원하는 게 이거지?'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A부장 밑에 있든 B부장 밑에 있든 힘들면 힘들다고 일 많으면 많다고 말해야 한다. 말해도 달라지는 게 없을 수도 있지만 위에선 정말 말 안하면 모르는 것 같다. 찍 소리, 악 소리 안 내는 사람이 손해다. 소리 내는 사람한테 갈 일도 조용히 일하는 사람한테 간다. 부장들은 몇 번 경험이 쌓이면 그냥 기계적으로 돌발 업무가 생겼을 때 조용히 일하는 넘한테 맡긴다. 본인들도 껄끄러운 건 싫으니까. 나도 까칠하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
악 소리를 내서 받은 소중한 시간 중 1시간을 포스팅에 할애했다. 이제 일해야지 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