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1등기업 실적 자료를 받아서 발제를 하던 31일 아침, 갑자기 '주식 50:1 액면분할 의결'이라는 한줄 속보가 떴다. 나의 사고는 다음과 같이 흘러갔다.
'액면분할이 뭐야?'
'주식 쪼갰다고?'
'근데 뭐 어쩌라고 속보를 날리고 ㅈㄹ?'
'아 한장에 250만원짜리 주식을 5만원짜리 50장으로 만든다고?'
'이런 된장 엄청난 일이구나?'
'발제 다시해야 겠네?'
2인조 IT팀에서 본의 아니게 '쫄'을 맡고 있는 바, 시키는대로만 하는 로봇놀이를 하고 있는데, 하필 삼성전자 실적발표를 하는 이날 평소 절대로 직접 가지 않던 일정을, 그것도 무려 강원 강릉시까지 가신 나의 '짱'님.
그 분은 일찌감치 행사현장 기사 한꼭지만 발제해 놓고 카톡으로 이래라저래라만 하고 있었다. 로봇처럼 시키는대로만 발제했더니 아니나다를까 부장의 준엄한 문책이 따라왔다.
액분처럼 큰 기사는 당근 박스를 써야제
워째 이리 빈약하게 발제를 했디야
아, 일 잘하는 선배가 지적하면 저렇게 장난투로 말해도 검나 쫄린다는 걸 느꼈다. 일 잘하는 부장은 눈깜짝할 새 1면스트, 안쪽면 메인+서브 박스기사 발제를 만들었다. 우와~ 잘한다 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데 부장에게 톡이 왔다.
삼전 주가 표는 금융부더러 만들어달라고할테니 신경안써도된다
실적도 연합띄울테니 그거쓰면됨
집필에 집중하삼~
읭?
집필이요?
저요?
제... 제가 쓰나요?
제가... 다? 다 써요?
저기요 부장... 저 산업부 온 지 아직 한 달도 안 됐구요. 액면분할이 뭔지 방금 알았거든요. 한번만 살려주세요.
머리 속엔 이런 말들이 떠올랐지만
넵.
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결국 산업부 온 지 한 달 쯤 돼 가는 뉴비는 어제 1등 주식이 사상최초로 50대 1로 액면분할해서 황제주에서 국민주로 탈바꿈하는 날, 1면 스트레이트 5매와 안쪽면 배경과 전망 7매 박스를 썼다. 그리고 추가로 어떤 60대 아저씨가 불길에 휩싸인 차량에서 운전자를 구해내서 엘지가 의인상을 주기로 했다는 피플면 기사도 썼다.
마감이 휘몰아치고 부장이 예쁘게 데스킹 해놓은 기사를 확인한 뒤 집으로 달려가 엑스박스360 게임을 검나 하려고 했다.
그런데...
가판 넘어가고 홍보실 임원이 전활 했다.
기자님 오늘 정신 없으셨죠. 저희가 액면분할을 하면서 정말 이런 부분은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는 게 재판 이야기인데... 저희가 액면분할을 한 것은 정말 일반주주들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높아진 배당금의 혜택을 최대만 많은 분들이 누릴 수 있게 하고 장기적으로 주가 상승을 기대하는 이런 정도지, 재판을 앞두고 이런 의도는 전혀 없거든요...
하...
사실 미래전략실을 없애면서 그 기능 대부분이 전자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 총수나 그룹 차원의 이야기를 쓰면 전자에서 전화가 온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들어줄 수도 없고 안된다고 딱 잘라버릴 수도 없다. 물론 그들이 기사 몇 줄 갖고 광고를 끊어버리진 않겠지만, 그들이 광고를 끊으면 문 닫을 신문사가 어디 한둘일까. 어쨌든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거다.
그럴 때 쓰는 방법은 "저의 권한이 아니니 부장께 말씀을 드려보시죠"다. 그랬더니 "아 그렇죠 부국장(우리 부장은 부국장급)님께 말씀드리면 출입기자랑 얘기는 해봤냐고 하시니까요"라고 했다.
근데 오후 9시쯤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엔 그 임원 밑에 있는 분이다. 비슷한 얘기를 한다. 통화를 하고 있는데 그 임원한테 통화 중 대기 콜이 또 온다. 하아.. 이것이 이들의 작전이구나. 조낸 귀찮게 만들어서 다음번엔 처음에 쓸 때 알아서 수위를 조절해서 쓰게 만들려는...
그 때쯤 타사 모 선배에게 톡이 왔다.
[박모] [오후 9:31] ㅋㅋㅋ 기사를 너무 각을 잡은거 같은데?
[shiho] [오후 9:35] 아 졸라 전화오네요
[박모] [오후 9:42] ㅋㅋㅋ 잘 질렀다
[shiho] [오후 9:43] 별로 쎄게 안 쓴 거 같은데 아오 이밤에...
아 1등기업 기사는 각을 잡으면 앙대는 건가. ㅋㅋㅋㅋ
부장께 전화를 했더니 "대안을 제시하라고 해라" 셨다. 임원에게 전화해서 대안을 물어봤더니 "경영권 방어 전략 분석도"라고 돼 있는 제목도 바꿔달라고 했다. 대안이라고 내 놓은 게 정 반대의 톤이다. 말도 안 됐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부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한잔 하시느라 못 받는다. 임원에게 톡을 날렸다. 부장이 전화를 안 받으신다고. 그래서 못 고쳐드릴 것 같다고
나중에 부장과 통화가 됐지만 우리 신문 종판 마감은 타사보다 훨씬 이르다. 결국 못 고치고 그대로 오늘 아침자에 나왔다.
하하하 신난다.
기사 링크는 안 붙인다. 창피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