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구악들이 자신이 하는 짓이 구악인줄 알면서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스스로 훌륭한 기자라고 생각하지만, 후배들이 보기엔 구악일 수밖에 없는 참 짠한 사람들이다. F씨는 그런 '부지불식형' 구악이다.
F씨는 지금까지 소개한 다른 구악들과 달리 물욕이 없다. 재물과 향락을 밝히지 않고 골프도 안 친다. 특정 분야에 나름의 전문성도 가졌으며, 왕년에 노조 활동도 세게 했다. 승진 욕심도 해외 연수나 출장에 대한 집착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기사를 매우 잘 쓴다고 생각한다.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후배들 기사에 관해 할 말이 많은 것으로 보아, 자신의 기사쓰기가 완전한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아무런 욕심도 없고 단지 후배들에게 정확한 기사쓰기나 내가 가진 것들을 전수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라는 얘기를 자주 한다. "내가 너희보다 나은 것이라곤 단지 조금 경험과 노하우가 많다는 것 뿐이니 그걸 너희들과 공유하겠다"는 얘기도 잘 한다.
F씨는 후배들 기사에 관해 잔소리를 엄청나게 많이 한다. 데스크를 보면서 오자 하나에도 득달같이 전화를 해서 기사를 보내기 전에 여러번 읽으라며 다그친다. 기자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쓰기 원칙을 강조한다. 조금 다르게 써보려고 한 것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기사쓰기는 그다지 배울만한 게 못 된다. 그냥 지나치게 매마른 글이다. 모든 문장을 하나하나 단문으로 쪼개고 통신기사처럼 매 문장이 끝날 때마다 엔터를 친다. 요즘은 통신기사도 그렇게 쓰지 않는데 말이다. "조지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는데 정작 그가 쓴 칼럼을 보면 아이템도, 시각도 새로울 게 없는 언론사 입사 시험글 수준이다.
자신의 기사도 그렇지만 데스킹(후배 기사 출고 전 손질)은 더 형편없다. 후배가 쓴 기사에 연합뉴스의 기사를 그대로 옮겨다 바른다. 그러다보니 사고가 난다. 후배가 혼자 취재해서 녹여 넣은 부분을 연합뉴스가 참고해서 자신들 기사에 반영했는데, 밤중에 작성자와 상의도 없이 데스크를 보며 그 기사를 다시 갖다 붙여서 단독성 기사를 연합뉴스 우라까이 기사로 만들어 놓는가 하면, 연합뉴스가 잘못 쓴 틀린 부분을 확인도 하지 않고 끼워넣어 출입처에서 수정 요청이 오게 만들기도 했다.
문장 표현은 또 얼마나 옛날식인지, 그가 손 본 기사가 나가는 것을 후배들이 창피해 할 정도다. '~하고자' 같은 옛날 기사 표현과 '제기된다' 등의 굳이 쓸 필요가 없는 한자어의 남발이 대표적이다. 한 번은 후배가 '반발했다'고 쓴 걸 그가 '반발이 제기돼 왔다'고 고쳤는데 그걸 교열부에서 다시 '반발했다'로 고친 적도 있다.
F씨는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관대하다. 자신이 연합의 틀린 팩트를 베껴 넣을 땐 들이대지 않았던 '팩트확인'의 잣대를 취재원의 손질 요청에만 들이댄 적이 있다. 출입처에서 담당자가 정확한 팩트를 알려주며 정정을 요청해서 고쳐주겠다는데 "팩트를 정확하게 확인해서 고쳐 주라"면서 "걔네들이 거짓말하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했다. 팩트 확인은 애초에 당신이 쓸 때 했어야 하는 거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부분이 언제, 어디서나 통용된다고 믿는다. 이것도 전형적인 구악성이다. 예컨대, 그는 현재 출입처엔 약 15년 전에 잠깐 나간 것이 전부라, 사실상 처음이나 마찬가진데, 전혀 후배들에게 배울 생각이 없다. 그러다보니, 업무에 자주 충돌이 일어났다. 자신이 출입했던 당시에 출입처 말단이었다가 지금까지 여러 직업을 전전한 뒤 돌아와 한직에 있는 사람에게서 들은 영양가 없는 얘기를 무슨 대단한 정보인양 공유하는 걸 보면 짠하기 이를 데 없다.
정부부처에 오래 출입한 그는 어딜 가도 공무원들만 찾아다니며 부처를 취재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에서나 통하는 건 아니다. 자꾸 엉뚱한 취재원에게 확인해 보라고 해서 후배들이 애를 먹었다.
여기까지는 F씨의 무능과 아집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가 이것만으로 구악열전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F씨는 항상 후배들과 충돌한다. 그는 이전 부서에서 후배의 단독기사를 데스킹하며 연합뉴스의 전혀 다른 기사를 붙여 넣었다. 후배가 항의하자 그는 부장 앞에서 통화하다 큰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며 "너 기자생활 몇년차냐"고 소리질렀다. 후배의 담당 팀장에게 전화해 "후배 교육 똑바로 하라"며 욕을 하기도 했다.
다른 부서에서는 여성 후배에게 "미친X"이라고 했다가 부장에게 주의를 받았다. 이번 부서에서도 후배들과 계속 충돌하고 있다.
반면에 그는 윗사람들에게는 큰 소리 한 번 못 낸다. 후배들 앞에서는 윗선들을 비판하지만 앞에서는 '예스맨'이다. 부장에게 열심히 일하는 데스크로 잘 보이기 위해서 후배를 깎아내리기도 한다. 후배를 조지면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출입처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언론사의 대표선수로서 출입처에 나가 있는 거라고 후배들에게 강조하지만, 명색이 대표선수들을 이끄는 입장으로 출입처에 나가서는 고위직 주요 취재원 근처엔 얼씬도 못했다.
사실 그를 구악열전에 올리는 데에 잠시 고민이 있었다. 그가 구악이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고, 그의 구악성은 짠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구악도 있다는 걸 독자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를 열전의 마지막에 싣는다.
- 구악열전 정주행하기
예고편
1. '땡김'에 관하여
2. 유통기자의 전설 A씨
3. 해외출장 전문기자 B씨
4. 측은하기도, 하지만 애정할 순 없는 C씨
5. 지역기자의 '토호'화에 관하여
6. 편집국, 보도국의 골퍼들
7. 기업의 '기자관리'와 놀아나는 기자들
8. 홍보팀 D군 카톡 인터뷰
9. '정치기자' E씨
by @tata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