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컴의 면도날

sanscrist(56)
Published in
#kr
Words
731
Reading
4 min
Listen
Play
8y

정 반장은 언제나 생각했다. 세상에 미스테리 같은 것은 없다. 만일 지금 당장 뾰족하게 미스테리의 진위를 알 수 없더라도, 언젠간 그게 헛소리라는 게 밝혀질 것이다. 정 반장은 ‘오컴의 면도날’ 개념을 좋아했다.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는, 잘 접어서 장농 속에 넣어두는 것이다. 하지만 결론을 유보할 필요도 없이, 이 사건은 꽤나 쉬운 사건이었다.

개요는 이렇다. 부부는 6월 3일부터 현재 6월 9일까지 인터넷,금융,출국 기록 없이 실종되었다.

아내는 5월 27일에 3일치 정도 먹거리를 잔뜩 사서 집에 들어가는 것이 CCTV에 찍혔다.

5월 28일 새벽 3시경, 남편이 귀가하였다.

남편은 5월 28일에 횟집 동업자에게 가게를 쉬자고 한다.

아내는 극단 관계자들에게 더 이상 연극을 할 수 없게 됐다고 문자를 보낸다.

5월 29일 극단 회원이 아내와 통화를 하려다 실패하고 남편에게 연락하고, 남편은 아내가 더 이상 공연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남편은 동업자에게 말일 결제일에 메워야 할 돈과 가게 통장을 넘기며 사정이 생겼으니 앞으로는 혼자 운영하라고 말한다.

6월 2일, 남편이 자신의 부친에게 “괜찮아요”라는 문자를 보낸다.

6월 2일 오전 9시경, 남편의 휴대전화 신호가 부산 기장군에서 끊어진다.

6월 2일 오후 10시경, 아내의 휴대전화 신호가 강동구 천호동에서 끊어진다.

아파트의 계단과 출입구에는 모두 CCTV가 있다. 그러나 비상계단에는 CCTV가 없다. 하지만 아파트 출입구와 지하주차장 출입구에 CCTV가 있기 때문에, 그곳에 보이지 않기는 어렵다.

집에는 침입 흔적도 혈흔도 없었고 깨끗했다.

그렇다면 핵심은 ‘왜’ 그렇게 나갔을까? 부부가 그냥 잠적했다면 굳이 본인들이 아파트 CCTV에 찍히지 않을 필요는 없었다. 평범한 외출인양 한 후 안 돌아오고 경로를 추적할 꼬리를 남기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부부가 납치되었다면 부부의 집은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답은 하나이다. 부부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죽이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아파트를 나와야 했기에 CCTV를 피한 것이다.

부부가 빠져나간 차량의 운전자가 CCTV에 찍히기에, 부부 중 하나는 뒷좌석에 엎드려있고 조력자가 있을 것이다, 또 범행 또는 60kg가 넘는 가방을 옮기는 데도 도움을 주었을 수 있다.

부인은 5월 27일 이후 누구와도 육성으로 연락이 닿지 않았다. 반면에 남편은 가족 및 지인들과 6월 2일까지도 연락이 닿았고 심지어 통화까지 했다. 문자는 조작할 수 있고, 음성통화를 마지막으로 한 것이 남편이므로 남편이 가해자이고 아내가 피해자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부인의 휴대전화 신호가 사라진 강동구 천호동은 남편의 모친이 살고 있는 곳이다. 남편의 부모는 별거중이기 때문에, 남편은 자기 엄마에게 찾아가서 모든 사정을 다 이야기했으나, 남편의 아버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다가 아무것도 모르고 경찰에 신고를 했을 것이다.

이미 가까운 숙박업소들도 다 조사했고 이곳에 설치된 CCTV들도 다 살펴봤다. 자동차 수법 말고는 절대로 사각지대가 없는데다 가까운 곳의 숙박업소들을 다 뒤졌는데 나오지 않았으니 차에서 잤거나 멀리 가서 잤을 것이다.

굳이 6월 2일에 남편이 모친을 찾아간 것은 수중의 현금이 떨어져서일 것이다. 그리고 만일 남편이 아직도 살아있다면 계속해서 공범자나 가족이 돈을 대주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은 철저한 계획범죄이다. 남편은 자기의 노트북과 아내의 노트북을 들고 나갔고,

아내의 핸드백을 들고 나갔고,

아내의 속옷, 여름옷, 여권, 휴대폰을 자신의 것과 함께 챙겨 나갔다,

거기에 집을 나간 후 자신의 계정으로 절대 로그인하지 않았다.

또 현금인출기 앞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으므로, 자신만 인출하는 것을 경찰이 안다면 당연히 경찰이 자신이 범인인 살인사건을 의심할 것이므로 돈을 인출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철저한 설정들에 의해 불가사의한 실종사건 또는 부부동반 가출 잠적으로 위장한 것이다. 그러나 사건 당일 아내가 장을 봐 왔으며, 심지어 대용량 제품들이 많았고, 잠적할 때 챙기지 않고 냉장고에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실수를 했다.

남편의 가족과 친구들은 ‘이전에도 몇 개월간 잠적한 적이 있다’ 같은 진술을 하는 중이다. 심지어 경찰에 신고한 아버지마저도 그렇다. 당연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남편에 대해 전부 알고 있고 입을 맞추고 있다.


흔적 없이 사라진 부산 30대 부부 미스터리

잠적일까 납치일까…CCTV 촘촘해 제3자 개입 가능성 높아


인터넷 기사를 뒤져보던 정 반장은 생각했다, 3개월, 3개월이다. 밀항 흔적도 잡지 못했고,(그건 원래 놓칠 수도 있지만) 당연히 출국기록, 통신기록, 금융기록도 새로 나오지 않았다. 좆 빠가같은 수사과 새끼들, 강력사건인걸 일주일 넘게 감 못 잡으니 증거도 다 놓쳐버리는거 아냐, 씨발놈들. 아내의 지인이 인터넷에 제발 그녀를 찾아달라고 글을 올렸고, 그게 화제가 되어서 사건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저렇게 ‘미 스 터 리’ 라는 대문짝만한 글자들을 꼭 끼워서 말이다. 승냥이떼같은 새끼들.

남편은 자살했을 것이다. 아니..아니지..낮은 확률로는 외국이나 조용한 곳에 잠적했을지도 모른다. 에미 씨바것, 대체 아내는 왜 죽이려 한거야?

당연히 결론을 낼 수 없다, 정 반장은 오컴의 면도날을 꺼내며 생각했다. 사건에 대해 좀 더 아는 것이 적었으면 좋았겠다. 고 새끼가 증거를 좀 더 잘 숨겼으면 좋았겠다. 이 사건이 미궁에 빠져서 단칼에 면도날로 생각을 끊어 버렸으면 좋았겠다. 이게 미스테리였으면 좋았겠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정 반장은 소가 납치되는 일도 없고, 외계인이 추락하는 일도 없고, 정부가 우리에게 진실을 가끔 숨기지만 맨날 숨기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무능한 정 반장과 그의 충직한 들개같은 새끼들과 들개들이 사람을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죽인 개씹쓰레기 같은 살인자를 눈을 뻔히 뜨고 놓쳤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지만, 좌천동에서 모녀가 살해당한 후 집이 불탔다. 남편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고 있다. 정 반장은 어쩔 수 없이 쉭쉭 입으로 소리를 내며 면도날로 지금까지 생각하던 것을 끊어냈다.


1월에 썼던 소설입니다. http://www.ekn.kr/news/article.html?no=235770 실화를 보고 작성했습니다.

오컴의 면도날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