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4월 21일 막장에서 벌어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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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석탄공사 사장이 작심을 하고 언론에 대고 한 마디 한 적이 있었다. '막장 드라마'니 '막장 국회'니 하는 말을 쓰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광산에서 제일 안쪽에 있는 지하의 끝부분을 뜻하는 ‘막장’이라는 말이 최근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석탄공사 사장으로서 항의하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처럼 불륜이 설치는 곳도 아니고 국회처럼 폭력이 난무하는 곳도 아닌 '숭고한 일터'인 '막장'을 왜 그런 곳에다 갖다 붙이느냐는 항변이었다. 그 충심은 충분히 이해하고 막장이 숭고한 일터라는 주장에도 이의가 전혀 없지만, 그 엄혹한 노동 강도와 위험한 작업 환경 때문에 탄광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들을 '막장 인생'이라 일컬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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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이나 태백 등 왕년의 탄광지대에 가면 석탄박물관이라는 것이 있다. 한때 전 국민의 난방 도구였던 연탄을 캐내면서 호황을 이뤘던, 그러나 지금은 퇴락해 버린 지역의 추억과 애환을 담아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곳이다. 언젠가 들른 문경 석탄박물관에서는 광부의 월급 명세서를 진열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설명에 따르면 광부의 월급은 당시 공무원들에 비해서는 물론, 웬만한 직장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이라고 했다. 그러나 탄광촌 이 대부분 교통이 불편한 오지에 있었고 물가가 3-40퍼센트나 높았던 것을 고려한다면 그 월급 봉투는 빛 좋은 개살구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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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4월 21일 최대 규모의 민영탄광이었던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의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일련의 '사태'가 벌어진다. 사북탄광은 연간 생산량 160만t, 종업원 수 3000명, 전국 채탄량의 9%를 자랑하는 국내 최대의 탄광이었다. 박정희의 죽음이 몰고 온 80년 '서울의 봄'은 산 넘고 물 건너 남한 최대의 '막장'에도 밀려 왔다. 그런데 막장 인생에서 벗어나 탄가루처럼 켜켜이 맘 속에 맺힌 울분을 풀어 보겠노라고 어깨를 펴던 광산 노동자들에게는 사장보다도, 정권보다도 더 싫은 '공공의 적'이 있었다. 그건 광산 노조 사북지부장 이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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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전국 광산 노조 지부장 회의에서 42.75%의 임금인상 요구안이 결정됐다. 그런데 사북에서는 묘한 반란(?)이 일어났다. 어용 노조위원장으로 정평이 있던 이재기 지부장이 비밀리에 20% 인상으로 합의를 해 버린 것이다. 이재기는 64년 노조 설립 이후 몇 번씩이나 노조 지부장을 맡았던 인물로서 서울 등 요로를 찾아다니며 높은 분들과만 어울리는 통에 지부장 얼굴조차 모르는 조합원이 반이 넘었다고 한다. (국가기록원, <사북사태>) 그 이재기가 또다시 회사와 야합, 대의원 확보에 나선지 단 두 달만에 제 5대 지부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력의 노조 지부장이 사측과 어처구니없는 합의를 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사북은 발칵 뒤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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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은 이재기 퇴진과 40% 임금인상을 요구했지만 이재기는 "나는 강원도지사가 임명한 노조 지부장이다."라고 버티면서 경찰에게 '신변보호' 요청을 해 공권력을 끌어들였다. 경찰이 노동자들을 연행하자 사북지서 앞은 분노한 노동자들로 홍수가 났다. 21일 집회마저 계엄령을 이유로 불허되자 노동자들은 폭발했다. 몰려든 노동자들에게 기가 질린 경찰들은 지프를 타고 도망치려 하다가 그만 5명의 노동자를 치어 버렸다. 사망자는 없었지만 노동자들의 분노를 격발시키기에는 충분한 방아쇠였다. 사북항쟁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로부터 나흘 동안 사북은 분노한 광부들에 의해 장악된다. 정선경찰서장이 갈빗대가 부러지도록 두들겨맞은 후 피신할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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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된 것은 이재기였다. 하지만 이재기는 이미 경찰이 피신시킨 뒤였고 고스란히 그 분노를 받아야 했던 것은 이재기의 부인 김순이였다. 김순이는 이웃집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끌려나와 집단폭행을 당했고 발가벗겨진 채 탄광 정문에 묶였다. 말로는 차마 하기 어려운 몹쓸 짓이 이뤄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울에서 신문 기자들이 내려왔을 때 광부들은 발가벗은 채 묶여 있던 김순이를 촬영하라고 했지만 신문 기자들은 그렇게는 신문에 나갈 수가 없다고 설득해서 옷을 입힌 뒤 사진을 찍었다. 기둥에 꽁꽁 묶인 채 공포에 질려 있던 김순이의 사진은 그렇게 역사에 남게 된다.
남편의 허물을 아내에게 묻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고, 항쟁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대법원이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은 사북사태 당시의 광부들에게 김순이에게 배상할 것을 명하는 판결을 내린 바도 있다. 하지만 악몽 같았던 김순이의 48시간의 책임을 성난 광부들에게만 미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지 못하는 노동조합이란, 그리고 제 잇속 차리기 바쁜 지도부나 그들만이 즐기는 '그들만의 리그'란 그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에게 가공할만한 분노를 일으키는 법이기 때문이다. 옛날 조선 시대 민란 때에도 먼저 맞아죽거나 불구덩이에 던져졌던 사람들은 양반이나 탐관오리들이 아니라 일반 백성과 크게 다른 처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의 탐욕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향리들이나 마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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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4월 21일 일어난 사북 사태는 노동운동사상 중대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으며 작게는 동류(同類)로서 그 동류를 배신하거나 그렇게 비쳐졌던 이들이 직접적인 압제나 착취의 주체들보다 더한 분노의 과녁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생생하게 보여 준 사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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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 노동에 종사하면서, 또는 위험하고 고된 작업을 도맡으면서도 정규직에 비해 터무니없는 댓가를 받아야 하는 비정규직들이 즐비한 가운데 양심과 체신머리 동시에 없이 자기 자식들의 정규직 취직 시에는 가산점을 줘야 한다고 단체 협약을 맺은 어떤 대기업의 정규직 노조원들은 과연 그 교훈을 깨달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