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삼천구

sanha88(71)
Published in
#kr
Words
671
Reading
3 min
Listen
Play
8y

<특명 아빠의 도전>을 연출할 때 일입니다.
.
어느날 특명 아빠로 나선 분은 경기도 부천에서 용달업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20평 서민 아파트에서 돈 들어갈 일 태산같은 대학생, 고등학생 딸을 거느리고 사시는 분이었죠. 그분에게 주어진 특명 과제는 어이없게도 골프 칩샷이었습니다. 골프채라고는 간혹 이삿짐 나를 때 만져만 봤을 용달차 기사님께 '칩샷'(골프 세트에서 25센티미터의 장애물을 넘어, 건너편 홀에 홀인시킴) 과제를 드렸으니 저도 나중에 천당 가기엔 초저녁에 글렀지 싶습니다.

.
칩샷 피치샷_02.jpg

헌데 이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저희를 놀래켰습니다. 다음 날 오히려 전날의 시범맨을 능가하는 칩샷 실력을 과시하면서 완연히 익숙한 폼으로 골프공을 두들겨 몇 번씩이나 홀인원에 성공하는 겁니다. 혹여 기회를 얻지 못해 초야에 묻혀 버린, 비운의 늦깎이 골프 신동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찰나 그 아내가 한 마디 던졌습니다. “어제 저 사람 공 저 양반 어제 오늘 골프공을 3천 번쯤 쳤을 거예요. 잠 거의 안 잤으니까.”

.

그날도 늦게 배운 골프질(?)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채 골프채를 한시도 놓지 않으려는 연습벌레 아빠와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이제 그만 자자고 푸념하는 엄마의 실랑이를 촬영하고 있는데 나지막한 아빠의 중얼거림이 제 귀에 들어왔습니다. "지은이 피아노만 생각하면 잠이 안오네." 이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궁금증을 풀지 않으면 밥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PD는 바싹 달라붙어 캐물었습니다.

.
원래 이 집에는 음악을 좋아하는 딸을 위해 무리해서 샀던 피아노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아버지의 혼자 힘으로는 좀 벅차서 외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서 장만을 했다고 하지요. 그러나 “자기 생각은 지지리도 안 하면서 남 생각은 끔찍이도 하는” 아버지의 사업 수완 덕에 집안 경제가 위기를 맞으면서 딸의 피아노는 중고 딱지가 붙은 채 집에서 들려 나가야 했다고 합니다. 이사 갈 집에는 피아노를 놓을 자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
낡은피아노.jpg

“너무 미안했어요. 딸애한테...... 오래 있던 살림살이 들어내면 그 아래 먼지가 깔려 있잖아요. 그 먼지를 닦아 내면서 아이가 소리 없이 울고 있더라고요. 혹시 우리 들을까봐 입을 꽉 다물고 눈물만 철철 흘립디다.”
.

그날 밤 늦도록, 아저씨는 딸이 보관하고 있던 악보들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바이엘부터 재즈 피아노까지, 한 상자 그득한 악보들을, 까맣게 그려진 콩나물의 궤적을 아버지는 손과 눈으로 훑었습니다. 그러면서 피아노가 사라진 날의 그 서글픈 풍경을 떠올렸는지도 모르지요. 피아노를 지켜 주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는 딸이 어렵게 신청해서 맞게 된 이 도전이라도 성공하고 싶었던 겁니다. 하루에 골프공 3천 구를 날리면서 말입니다.

.

녹화를 준비하는 동안 영상 테스트를 위해 스튜디오에 내려보낸 화면에 마침 이 아버지의 사연이 실렸습니다. 그런데 그를 묵묵히 지켜보던 세트 감독이 망치와 못을 들고 골프 칩샷 세트로 가서 뭔가 두드려 댑니다. “뭐 이상 있습니까?” 의아해하면서 묻는 제게 세트 감독은 엉뚱한 답을 해 왔습니다. “PD님 눈 좀 감아 줘. 어떻게 좀 해 주려고 그래.”

.
세트 감독의 말인즉슨 화면을 보니 홀인원 구멍의 안쪽에 인조 잔디가 덧대어 있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공이 나무에 맞고 튀어나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조 잔디를 얇게 잘라서 구멍 테두리에 둘러 주면 그만큼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얘기였지요. 엄연히 게임인데 그러면 안되죠 하면서 팔을 들려다가 저는 팔을 내려 놨습니다.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해 봐야 조족지혈에 불과할 것 같고, 정말로 그를 성공시키려는 의도였다기보다는 그 아버지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 소망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나이 엇비슷한 동년배 아버지로서의 연대감의 표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트 감독은 간단한 작업을 끝낸 뒤 주문처럼 한 마디를 했습니다. “들어가라. 꼭 들어가라.”
.
세트 감독의 반칙성 기원도 헛되이, 그리고 두 손 모아쥐고 성공을 기도했던 저와 가족들의 눈망울도 헛되이 실로 아슬아슬하게 아버지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허허로이 딸들을 바라보자 딸 둘은 일제히 웃으며 뛰어나와 아버지를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그때 저는 가슴이 찡해졌습니다. 녹화 전 딸 둘이 자기들끼리 하는 얘기가 쟁쟁히 울려 왔기 때문입니다.
.
“언니 울지 마 그때처럼.” “너나 울지 마 임마.”
.

딸들은 행여 아빠가 서운할세라 너무 밝다 못해 눈이 아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아빠 괜찮다고 수고했다고 말이지요. 참가상으로 큰 아이의 소원 상품이었던 디지털 카메라 (상품 담당으로부터 막무가내로 빼앗아 왔었습니다다)를 내밀었을 때 그 딸은 대학생답지 않게 팔딱팔딱 뛰며 좋아했습니다. 그건 디지털 카메라를 얻은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아빠 앞에서 자신의 기분을 오버해서 보여 주려는 가식이었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연기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그렇게 아름다운 가식을 본 적이 없습니다
.
아이가 좋아하고, 아이와 함께 커 온 피아노를 이 악물고 처분해야 했던 한 아버지, 그 원수를(?) 갚기 위해 골프채를 수만 번 휘둘렀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가 다시 한 번 마음 아플세라 머리에 꽃 꽂은 여인네처럼 웃고 떠들었던 딸 아이들의 목소리를 떠올려 봅니다. 언젠가 그 집에도 다시 피아노가 놓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큰딸이 녹슬지 않은 연주 실력으로 손을 건반 위에 얹을 때 그 아버지도 저처럼 헤벌쭉 웃으며 그 음악을 감상하게 되기를 다시 한 번 빌어 보고 말입니다.

아버지의 삼천구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