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올라서서 용마산 굽어보니

sanha8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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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올라서서 용마산 굽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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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동기들과 한 달에 한 번 가벼운 산행을 한다. 얼마나 가볍냐 하면 산행이라는 말을 하기가 좀 무안할 정도다. 대청봉이나 지리산 종주를 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나 같은 둔재를 배려하여 남산이나 서울 성곽길, 청계산, 남한산성 순성 쯤으로 코스를 잡는다. 지난 주말은 아차산을 올라 능선을 타고 용마산으로 넘어오는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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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장한 길이었다. 서울에서 수십 년 살았지만 묘하게도 아차산을 제대로 가 본 적 없었고, 거기에 산재한 고구려 보루도 한 번도 구경한 적이 없었기에 재현된 것일망정 휴전선 이남에 남아 있는 몇 안되는 고구려의 흔적을 지나쳐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아차산은 높이는 낮아도 무시 못할 풍광을 지니고 있는데다 그날 날씨가 가히 ‘자연문화재’ 급이어서 나의 선택은 최상의 퀄리티로 인정받았다.

그래도 사학과 출신이라고 여기 저기 나다니다 보면 맨스플레인을 일삼게 된다. 처음에는 물어 봐서 대답하는 수준이지만 나중에는 내가 먼저 이것 저것 설명하고 있다. 이 날의 화제는 주로 고구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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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출신으로 추정되는 온달과 평강 공주의 로맨스를 소환하며 온달이 화살을 맞고 죽은 곳 중의 하나로 이곳 아차산이 비정되고 있다고 얘기하다가 갑자기 얘기가 얼마 전 이혼한 삼성가의 공주님 커플로 튄다. 동기 하나가 소리를 지른 것이다. “그 남자가 내 입사동기잖아.” 잠시 우리의 화제는 한참 삼성가의 왕자와 공주 이야기로 흘렀다가 아차산 산마루에 재현된 보루에 이르러서야 다시 고구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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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에서 용마산을 거쳐 멀리 북한산 자락 보루길에 이르기까지 고구려는 능선 따라 촘촘히 보루를 건설했다. “얼마나 고구려가 여기를 지키고 싶어했는지 알 수 있지 않냐. 여기는 대규모 부대가 있던 곳은 아니고 소규모 병력들이 주둔한 요즘의 GOP 같은 곳이었지. 여기서 보면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 한강 이남이 훤히 보이고 하남에서 동호대교 정도까지는조망할 수 있었거든.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펴서 아산만까지 쳐 내려갔지만 백제와 신라가 반격해 오면서 한강까지 밀렸고, 이 이상은 안 내 준다는 각오로 이 보루들을 배치해 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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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P가 얘기가 나오다보니 문득 이 아차산의 보루들보다 더 최전방에 있었던,요즘으로 치면 철책 안의 GP 같은 최최전방 보루가 있었던 게 떠올랐다. 바로 구의동 보루다.

구의동에 있던 해발 수십 미터의 구릉지대에는 돌무더기 등 삼국시대 유적이 있었는데 화양 지구 토지 구획 정리 작업이 이뤄지면서 발굴의 삽을 뜨게 된다. 한강변에서 고구려 유적이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안했고 백제 고분 쯤으로 가늠을 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뜻밖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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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촉만 1천 3백개가 넘게 나오고 창 9점, 도끼 4점, 긴 칼 2점 등 개인 무기에다가 고구려 양식의 토기는 물론, 병사들이 밥을 지어 먹었을 철제 솥과 항아리가 아궁이 위에 놓인 채 발견된 것이다. 보루였다. 열 명을 좀 넘는 고구려 병사들이 한강변에서 멀지 않은 수십 미터 고지에서 한강 너머의 적을 감시하고자 배치돼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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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군인들도 최전방의 군인들은 “전쟁이 터지면 몇 분이라도 버티는 것이 임무”라고 하거니와 구의동 보루의 고구려 군 역시 비슷했을 듯하다. . 이 보루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근처 홍련봉 보루가 눈치를 챘을 것이고 아차산 보루에서는 그걸 내려다 보며 철수를 하든 파발을 띄우든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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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구의동 보루에서 그렇게 많은 유물이 튀어나왔던 이유는 비극적이다. 구의동 보루는 몰래 강을 건너온 나제 연합군, 또는 백제군에 의해 철저히 기습을 당한 것 같기 때문이다. 화살을 천 삼백개나 쌓아 놓고도 제대로 쏘지도 못한 채, 개인 무기라 할 창도 챙기지 못한 채, 결정적으로 후퇴할 경우 반드시 챙겨야 할 밥솥조차 건사하지 못한 채 그야말로 순식간에 제압당했다는 뜻이다. 유적 곳곳에는 불에 탄 흔적도 발견됐다. 그러니까 백제군 또는 나제 연합군은 회심의 기습을 한 뒤 이 보루를 불태워 버렸고 그 잿더미 위로 천오백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쌓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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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진짜 중요한 유적이겠다.” 한 친구가 말했다. 맞다. 백제의 성왕과 진흥왕 두 영걸이 연합하여 북진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고 고구려의 깃발을 뽑아 북한산 너머로 던져 버렸을 때, 그리고 진흥왕이 호시탐탐 성왕의 뒤통수를 칠 때만을 노리고 있을 즈음, 그 시기를 그렇게 생생하게 증언할 만한 유적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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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촉이 있던 자리, 아궁이에 놓인 철솥, 불에 탄 보루 등을 대충만 복원해 놔도 중국이 자신들의 지방 정권이라고 우기는 고구려의 거친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유적이 됐을 것이다. “구의동 어디에 있냐. 그 유적.” 한 친구가 물었다. 나는 서글프게 대답했다. “어느 아파트 지하에 있을 거야 아마.” 정확히 말하면 구의동 잠실대교 북단의 한양 아파트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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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은 엑 소리를 내면서 놀랐다. 문외한이 봐도 매우 중요한 유적인데 갈아 엎었다니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 그뿐이었을까. 아직도 우리는 백제 5백년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 자리를 정확히 모르고, 그 왕궁은 어느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잠들어 있을지 모르는데. 한때 풍납토성 발굴 때에는 학자가 분노한 재개발 주민들에게 감금되는 일도 있었는데. 아쉬움도 잠시 온갖 뽕짝이 흘러나오는 장비를 갖추고 산을 오르는 어르신들을 뚫고, 웬 리모콘으로 조종하는 미니카들 수십 대가 오프로드(?)를 펼치는 문명의 산 속으로 우리는 발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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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에서 내려다본 서울은 거대했다, 그 산에 1950년대부터 10년에 한 번씩 올라와 본 사람이 있다면 서울이 얼마나 장대하게 변했는지를 얘기하며 튀긴 침이 한강을 이룰 것이다. 우리 사는 동안에도 무섭게 변했고 “10년 전에 여기 뭐가 있었는데” 하면 코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그런데 변하는 와중에 우리는 너무 많은 걸 버리고 , 잊어 버리고 , 그리고 잃어 버리고 살면서, 그러면서 또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는 묘한 심리 상태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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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서명을 요청받으면 “우리 일상이 역사가 됩니다.”라고 적는다. 주위를 훑어 보면 세월이 가면 바스라질 것들이 거의 전부지만, 그 일상의 바스라진 먼지들 위에서 스멀스멀 돋아나는 게 있고, 그 줄기에서 새로운 일상이 꽃피고, 그게 층을 이루고 담을 이뤄 가는 게 역사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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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뒤 아차산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남아 있을 것은 무엇일까. 용마산 정상 부근의 헬기장 정도는 남아서 학자들이 그 용도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게 될까? 거기서 발견하게 될 우리의 일상은 무엇일까. 플라스틱 막걸리통? 아주머니들이 깜빡 놓고 간 접이식 의자? 어제 길섶에서 봤던 부러진 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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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기 승 전 광.... “우리 일상이 역사가 됩니다.”라고 서명 많이 하고 싶다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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