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4월 6일 첫끗발 왕끗발
전공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참으로 궁박해진다. 어려서부터 가기를 원했고, 관심도 드높았기에 ‘사학’(史學) 전공을 선택했음에도 막상 대학 때 지지리도 공부를 안했던 까닭이다. 결혼할 때 교수님께 주례 부탁을 드리고 싶어도 내 얼굴을 아는 교수님이 안 계실 것 같아 포기할 정도였으니 굳이 설명을 보탤 것이 없겠다. 그 참람함을 일단 제쳐 두고, 언제부터 역사라는 태산에 관심을 갖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아니면 2학년 때의 어느 날, 한 무덤 안을 들어갔던 기억을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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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한 뒷동산만큼 큰 고분들 가운데 출입구가 난 무덤을 아버지의 손 잡고 들어갔을 때 유리 상자 안에는 그 무덤의 주인이 누워 있었다. (물론 실제 모습을 재연한 것이었겠지만) 이미 시신은 검은 흙으로 변해 있었지만 금관 조각들과 금제 허리띠, 그리고 푸른 곡옥들이 그 흙의 머리맡과 허리께에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의 한 말씀. “저게 천오백년 전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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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으면서 저 흙더미가 당시 인기를 끌던 인형극 ‘박제상’에 나오는 그 임금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은 마치 어제 일인 듯 뇌리에 박혀 있다. 유리 상자 옆에는 또 다른 특이한 유물이 사람들의 발길과 눈길을 잡아채고 있었다. 그것은 ‘천마도’였다. 나무껍질인지 천조각인지 모를 곳에, 구름 위를 노니는 것처럼 그려진 천마의 생동감은 한글 겨우 뗐던 초딩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었다. 저것도 1500년 전의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닌가. 그 천마도 때문에 무덤은 천마총의 이름을 얻은 이 무덤에 발굴의 삽을 대기 시작한 것이 1973년 4월 6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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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지은 노래 가사대로 "삼국통일 이룩한 화랑의 옛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싶었던 까닭일까. 박정희는 경주에서 가장 큰 고분인 98호 고분 (황남대총이라고 불리우는) 을 발굴하라고 지시한다. 대통령의 한 마디가 그대로 법이었던 시절이었다. 하라면 죽었다 깨나도 해야 했고 파라면 손톱으로라도 파야 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고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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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우리 무덤 발굴은 외국인 학자들의 자문에 의지해 오던 터인지라 자력 발굴 경험이 일천했고 무덤의 규모가 워낙 대형이라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 지 엄두가 안났기 때문. 더구나 무령왕릉 날림 발굴의 악몽 (7월 5일자 산하의 오역 참조)은 고고학자들을 자다가도 일어나게 만드는 트라우마였다. 어찌 하면 그 전철을 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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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심 끝에 아이디어 하나가 등장한다. '98호 고분 앞의 155호 고분을 시험삼아, 연습삼아 한 번 파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155호 고분은 연습이 아닌 실전이 된다. 발굴을 시작한 석 달쯤 뒤의 어느 날 연구원들은 눈을 의심했다. 흙더미 속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뭔가를 찾아낸 것이었다. 그때껏 발굴된 것들 가운데 최고 수준의 신라 시대 금관이었다. 터질 듯한 가슴을 가까스로 억누르면서 금관을 수습하여 옮겨 나오는데 천만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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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은 지독한 가뭄으로 전국이 신음하던 해였다. 경주 지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왕의 무덤을 파헤쳐서 벌을 받는다.”는 유언비어마저 강성하게 돌 때였다. 그렇게 쨍하고 불볕만 내리쬐던 하늘이 갑자기 시커매지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무지막지한 소나기를 퍼부은 것이다. “왕이 자신의 영면을 방해한 것에 진노했다.”고 인부들이 줄행랑을 칠만큼 급작스런 기상이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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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파라오 투탄카멘의 저주는 유명하지만 우리나라 왕릉을 발굴할 때에도 기이한 일들은 있었다고 한다. 앞서 무령왕릉 때에는 발굴단 단장과 부단장이 나란히 교통사고를 내어 한 명의 어린이가 죽었고 천마총 발굴 때에는 박정희가 현장을 방문하기로 한 날 햇볕을 막기 위해 친 차양이 무너지면서 인부를 덮치는 괴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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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옛 임금의 심술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렇게 내린 소나기로 가뭄은 끝났고, 그로부터 한 달 뒤에는 또 하나의 보물인 천마도가 발견된다. 안장에 매달에 흙이 튀는 것을 막는 자작나무 껍질 장니에 그려진 천마도는 현존하는 신라 시대 유일의 회화로 남아 있다. 이렇듯 국보 3점을 비롯하여 만 점이 넘는 부장품이 쏟아져나온 155호 고분 천마총은 규모가 두 배였던 98호 고분을 제치고 그 유택을 헐어 후세인들에게 신라의 옛 모습을 전하는 역할을 맡는다. 첫끗발치곤 실로 왕끗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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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가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천마총에 들른다.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채 무덤의 이름마저 '천마'에 양보한 1500여년 전의 어느 왕의 안식을 방해하는 건 미안하나 천수백년 전 천마도 장니를 말안장에 걸치고 금관의 곡옥을 쩔렁이며 서라벌을 활보하던 위풍당당한 모습을 상상하는 건 언제나 색다른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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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한 추정 가운데 하나에 따른다면 천마총의 주인은 지증왕. 기골이 장대하여 어울릴만한 여자가 없었다는 그가 “지증왕 13년 섬나라 우산국”을 정벌하라고 이사부에게 호령하던 순간에 그는 천마도 장니를 두른 안장 위에 앉아 있지 않았을까. “더 이상의 순장 (귀한 사람이 죽으면 그 노비나 첩을 생매장하던 풍습)을 금하라. 천인인들 사람의 생명이 아니랴”고 일갈하던 순간, 그 금관은 태양처럼 빛나지 않았을까. (지증왕은 순장을 금한 왕이었다.) 천마총은 1500년 전의 신라에 드는 일종의 타임 터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