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가스집의 낡은 의자

sanha8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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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메뉴가 돈가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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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전이 됐네요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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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에 있는 `할아버지 돈가스'라는 간판을 내건 돈가스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 주인은 할아버지 되려면 족히 20년은 걸릴 듯한, 나이 마흔 가량의 젊은(?) 분입니다. 사연인즉슨 이 가게의 원 주인이 백발의 할아버지셨고 그때부터 이 가게의 이름은 할아버지 돈가스라 불리운다지요. 그러고 보니 가게의 벽에는 하얀 옷과 모자를 두른 노인장의 사진이 실린 신문 기사들이 몇 개 걸려 있더군요.

"아버님인가요?"
"아닙니다. 제게 이 일을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그럼 친척도 아니시구요?"
"예 아닙니다 어쩌다 인연이 닿아서 그분한테 이 일을 배웠죠."

촬영 스케줄을 잡는데 이 아저씨가 느닷없는 고집을 부립니다. 소스 만드는 걸 찍으려면 반드시 새벽 4시에 이곳으로 오라는 겁니다. 저는 사람 좋은 웃음을 그리면서 방송이라는 게 꼭 원래 그대로만 찍는게 아니며 한 열 시쯤 와서 소스 끓이는 폼만 잠깐 찍으면 된다고 타일렀는데 이 아저씨 단호합니다. "그럼 소스 끓이는 거 못 찍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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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 고집을 꺾지 못한 저는 다음 날 빛나는 새벽별을 바라보며 영등포에서 잠실까지 서울횡단을 단행해야 했습니다. 새벽 4시 정각에 도착했건만 이미 주인은 가스불을 켜고 열 몇 가지가 들어갔다는 브라운 소스를 휘휘 저으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더군요. 이게 웬 고생이냐며 고집도 어지간하시다고 불평반 푸념반 했더니 주인은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할아버지가 고집이 셌거든요."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의 지상 목표가 옛 스승이라는 '할아버지'와 똑같아지는 것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됐습니다. 밀가루를 입히는 양, 기름을 갈아 주는 횟수, 소스의 농도, 고기 튀기는 시간은 물론, 가게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고기를 다지는 모양새까지 할아버지를 흉내낸 거라고 했지요. 음식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돈가스 안주에 맥주 한 잔'을 찾는 손님들의 요구마저 단호히 거절하고 있었지요. 술을 팔지 않는 것이 할아버지의 영업방침이었다는 겁니다.

할아버지돈가스.jpg

하이얀 밀가루 옷을 입은 나비 모양의 등심살이 노릇노릇 튀겨지면, 새벽 내내 끓여낸 소스가 탐스럽게 얹혀서 손님들의 테이블에 오릅니다. 그런데 코흘리개 어린아이부터 포크를 삼지창이라 부를성싶은 할아버지까지 손님들의 절대다수는 이 집 주인이 할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알고 있더군요.

손님들은 무시로 주인에게 "아버님은 잘 계시냐?"고 물었고 주인은 "예 잘 지내세요."라고 천연덕스럽게 얘기했습니다. 어떤 이는 "저 부자(父子)는 그렇게 서로 닮을 수가 없어요."라며 아버지를 빼닮은 아들(?)을 칭찬하기도 했지요.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제 머릿 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 주인이 할아버지의 유명세를 빌려 장삿속을 차리려는 심사가 아닐까, `할아버지의 이름으로'를 모토를 삼고 작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죠. 어영부영 동네 사람들에게 아들 행세를 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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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내를 빙빙 에두른 끝에 주인에게 드러내 보았을 때 그는 정색을 하고 성큼성큼 가게 구석으로 가더니 뭔가를 들고 제 앞으로 왔습니다. 그건 눈에 띄게 낡은, 의자 하나였습니다.

낡은의자.jpg
가장 비슷한 의자를 골라 봤습니다.

"예전에 할아버지가 쓰던 의자예요. 할아버지는 딱 이 자리에 이 의자 놓고 앉아서 눈 부릅뜨고 일을 가르쳤죠. 언젠가 오늘 아침처럼, 밤을 새 가며 소스 열 통을 만들었는데, 맛을 보더니 죄다 버려 버리라는 거예요. 하도 기가 막혀서 왜 버려요 팔면 되잖아요 하고 반항을 했어요. 그랬더니 소리를 지르데요. 내가 처먹기 싫은 걸 손님이 처먹냐? 내가 먹기 싫은 음식을 손님들한테 왜 줘? 이렇게 할 거면 치아라' 때려치아라'."

주인은 마치 할아버지가 된 듯 의자에 앉아 그 호령을 재연했습니다. 어색한 경상도 사투리를 써 가면서 (할아버지의 말투가 그랬답니다) 마치 할아버지가 된 듯 눈까지 치뜨고 말입니다.

"그래서 손님들이 아들이냐고 물으면 그냥 그렇다고 해요. 설명하기 귀찮기도 하지만, 그래야 할아버지에 대한 책임감이랄까? 그런 게 생기니까요."

잠시 후 주변 스케치를 하고 돌아와보니 주인이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요리하는 방법에 삶의 방식을 더하여 전수해 준 스승님 강예수씨의 사진이었습니다. 혼자 장사하면서 힘들고 귀찮고, 때로는 욕심이 날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할아버지가 내지른 치아라(치워라) 치아라'가 귓가에 잉잉 거렸다지요. 돈가스 할아버지 강예수씨는 당신이 앉았던 낡은 의자로 당신의 호령을 기억하는, 그래서 의자를 차마 버리지 못하는 제자를 자신의 옛 터전에 남기고 어딘가로 떠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 없는할아버지 돈가스'는 한 올의 변화 없이 찾아드는 손님과 세월을 맞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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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방송이 나간 후 저는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그 할아버지 어디로 떠나신 건 맞는데 장사 그만두신 건 아니에요. 성남 수진역에서 장사하고 계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