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4월 6일 파업전야 개봉
“민주노조 깃발 아래 와서 모여 뭉치세 빼앗긴 우리 이 땅을....”로 시작하여 “너와 나 너와 나 철의 노동자”로 끝나는 노래가 있다. <철의 노동자>. <전대협 진군가>와 요상하게 짬뽕이 돼서 너와 나 너와 나 부르다가 ‘승리의 그 한길로’가 튀어나오거나 ‘투쟁으로 이룬 사랑’ 다음에 “아 전대협이여”가 뒤섞이는 혼란이 있었던 이 노래는 가수 안치환이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한 영화의 주제가였다. <파업전야>
그 영화가 개봉된 것이 1990년. 그 후 세월을 거치면서 안치환이 한국에서 알아주는 가수가 됐듯,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도 어느덧 한국 영화의 중견들이 됐고, 되어 있다. 장동홍 감독을 비롯, <접속>의 장윤현,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이은, <알 포인트>를 만들었던 공수창 등 쟁쟁한 이름들이 그때 <파업전야>라는 영화에 매달려 있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영화 내용에 별다른 것은 없었다. 김일성 주석 만세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과격한 선동 내용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영화 시작에서 개밥 같은 식당 밥 등 작업 환경에 견디다 못한 싸움이 소개되고 그게 실패로 돌아간 뒤 ‘동성철강’에는 고난의 세월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노조를 결성하려는 움직이 보이자 공장 주임은 고향 후배인 한수를 구사대로 삼아 이에 대처한다. 한수는 위장취업자를 고발해서 쫓아내고 회사는 노조 결성 주동자들을 해고한다.
출근투쟁이 이어지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그들을 외면하던 한수는 뜻밖의 복명을 만난다. 한수의 여자친구 미자네 공장이 파업에 들어간 것. 괴로워하던 한수는 노조 결성을 시도했던 원기를 만나는데 이 원기가 돌아가는 길에 ‘제임스 리’ (이때 유명했던 노조 파괴자)의 깡패들에게 테러를 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이 공장 점거 농성을 시작하고 여기에 또 깡패들이 투입되자 한수는 들고 있던 공구를 쳐들고 동료들과 함께 깡패들을 향해 달려나간다.... 뭐 그 정도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흡사 바늘에라도 찔린 듯 호들갑을 떨었다. “모든 예술 가운데 영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레닌의 말을 어디서 들은 건지 이 영화가 틀어지면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듯 영화 상영을 봉쇄하겠다고 나섰다. . 하지만 “몇 달간 쉬고 있던 기계를 (영화 촬영지는 실제 파업 중인 공장이었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밤새워 보수하고 기름칠을 하여 기계를 돌리고 조언은 물론 엑스트라도 마다하지 않은” 도움으로 완성된 영화가 개봉되지 않을 것도 아니었다.
마침내 1990년 4월 6일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영화가 개봉되자 종로구청은 득달같이 대표 김명곤을 고발했고 영화사 장산곶매에는 압수 수색 영장이 떨어졌다. 무슨 중세 시대 밀사처럼 몸에 필름을 칭칭 감은 사람들이 각 대학가로 스며들었고 16밀리 영사기도 분해해서 반입됐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를 보겠다는 대학생들과 못본다는 공권력간에는 일대 회전이 벌어졌다. “이 영화를 보는 것이 곧 투쟁”이었던 시대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회전의 절정은 전남대학교에서 있었다. 당연히 경찰들이 시비를 걸 것이지만 단순한 전투조 수준이 아니라 항일 빨치산처럼 지리산에서 합숙 훈련도 하며 무술을 익혔다는 전설이 무성한 정예 오월대 등이 버티고 있던 시절이라 영화 상영에 별 일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영화 상영 시간이 다가오면서 이 광주의 후예들은 그만 입을 딱 벌리게 된다.
헬리콥터가 그 굉음을 내며 전남대 상공을 비행하는 가운데 1천명이 넘는 전경들이 죽기살기로 덤벼들었고 포크레인으로 정문을 뜯어버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아마 영화 한 편에 그 정도의 병력과 장비가 동원된 일은 세계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고려대학교에서는 개그콘서트같은 일이 벌어졌다. 중앙일보에 난 장동홍 감독의 회고. “당일 날 필름이 못 갈 것 같아서 미리 갖다 놨다. 총학에서 필름과 영사기를 보관해놓고, 상영 당일에 영화를 틀 수 있게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담당자가 갑자기 어디를 간 거다. 금고에 필름을 보관했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급해서 용접공을 불러서 금고를 뜯었다. 근데 옆에서 지켜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거다. 저걸 뜯었는데, 안에 필름이 없으면 어떡하지라는. 그런데 정말 없는 거다. 큰일났다 싶을 때 어떻게 그 담당자가 우여곡절 끝에 도착했다. 나중에 하는 말이 사람들한테 혼란을 주려고 말을 한 게 금고에 넣는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다른 곳에 감춰 놓은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세월이었고 더 대단한 영화였지 않은가.
나는 그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뭣 때문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으나 아마도 영화 볼 자유를 위해 전경들과 함께 쎄쎄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특히 그야말로 시덥잖은 북한 영화를 상영할 때도 그랬다. “<인어공주>를 능가하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참 대담한 뻥으로 수식된 <온달장군과 평강공주>를 지켜내기 위해 학교에 들어온 전경에게 돌을 던져 댈 때는 사실 기분도 좋지 않았다. 내가 저런 3류 애니 지키자고 지금..... 하지만 다음날까지도 툴툴거리던 내게 지금은 미국에서 유유자적 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친구 녀석이 한 말은 지금도 기억에 선연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데모하고 소리지르고 했던 거...... 맘대로 책 좀 보자 영화 좀 보자 그런 거 아니었나? 주사파든 뭐든 왜 내 대가리에 든 거 가지고 왜 시비냐는 거 아니었나? 그걸 가지고 피곤해 하면 안되지 않냐? 북한 영화 틀자 말자의 싸움은 아니었거든."
그랬다. 내 맘에 드는 영화 하나를 찍어 보겠다고, 그리고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틀어 주겠다고, 검열 같은 거 받지 않겠다고 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구속되고 수배 받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 하나 보겠다는데 전경이 들어와 캠퍼스를 쑥밭으로 만들고, 영화를 본 노동자들이 해고되고, 학생들이 곤죽으로 두들겨 맞은 적이 있었다.
창작의 자유, 예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차츰차츰 허용된’ 것이 아니라 ‘무지하게 싸워서 따낸’ 역사에 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하는 날. 영화 <파업전야>가 1990년 4월 6일 개봉됐다. 그로부터 세월은 흘렀지만 장동홍 감독의 말은 새겨 둘만한 가치가 있겠다.
“세월이 흐르면서 현상은 많이 바뀌었지만 본질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젊은 관객들도 영화를 보면서, 비록 옛날 이야기라는 생각은 들겠지만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현실을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DVD 출시할 때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