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폭풍이 가져다 준 상처도 상처려니와 6.25는 한반도라는 병을 들고 한바탕 뒤흔든 듯, 남과 북, 동과 서의 한국 사람들을 뒤섞어 놓았던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부산 지역에서 즐겨 먹는 '밀면'이라는 음식은 냉면에 익숙한 이북 출신 피난민들이 구할 수 없는 메밀 대신 미국산 원조 밀가루를 써서 만든 음식이 일반화한 것이고, 해방 즈음만 해도 서울 시내에서도 그리 흔치 않았다는 냉면은 이제 한국인이 가장 즐겨하는 외식거리 중의 하나가 됐지요. 아바이 순대니 평양 만두니 하는 이북들도 완연한 이남 사람들의 먹거리가 됐구요. 아마 전쟁이 아니었다면 (그 옛날에) 충청도 처녀가 평안도 총각에게 시집가서 평생을 이북식 콩비지 가게를 하게 되는 일도 없었겠지요. 청계천 4가 길가에 있는 강산옥의 주인 아주머니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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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비지는 두부를 만든 뒤 나오는 부산물(?)이지만 이북의 콩비지는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음식이 아닙니다. 이른 아침, 청계천 거리가 부산해지기 전에 아주머니는 밤새 불려 놓은 콩을 갈아 연탄불 위에서 역시 긴밤을 보낸 사골 국물에 넣고 몇 시간을 휘젓습니다. 조금만 손을 놓아도 콩비지가 타 들어가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답니다. 그리고 가스불처럼 격렬한 불로는 제맛이 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걸려도 은은하게 솥을 데울 수 있는 연탄불을 쓰고요.
아주머니는 1.4 후퇴때 평양에서 남하한 집안으로 시집을 왔습니다. 시어머니에게서 콩비지를 배웠고, 가게를 열 때 시아버지는 '강산옥'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지요. 두고 온 강산을 잊지 못하는 마음이었는지 가게 한 켠의 벽에는 평양성과 대동강을 촬영한 두 장의 사진이 오롯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저기 가보고 싶다 가보고 싶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면서 우리 집에 오는 이북 손님들하고 고향 얘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지요. 그런데 좋은 세상 못보고 돌아가셨네요."
이북 손님 많은 식당들 여럿 방문해 봤지만 이 가게처럼 그 비율이 높은 집은 보지 못했습니다. 인터뷰들을 다시 보면 노다지 평안도 황해도 사투리들입니다.
"어딜 멀리 갔더랬는데 고조 이 콩비지 생각에 정말 환장을 하갔더라구."
"인간답게 사는 법, 열심히 사는 법, 그리고 음식같은 거는 이북 사람들이 이남 사람들한테 많이 개르쳐 줬지. 고럼!"
"고향이 평안남도 용강인데요. 어릴 적부터 이 콩비지를 식량 대용으로 먹어 놔서요."
소담한 쌀밥만큼이나 하얗게 몽글몽글 알갱이를 머리에 인 콩비지를 간장으로 간하고 무생채 하나와 나박김치 하나가 밥상의 전부인 콩비지 백반 앞에서 그들은 마치 고향을 퍼먹는 느낌으로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제가 침을 꼴깍꼴깍 들이킬만큼 맛있게들 먹어 치우셨지요.
그 중에 육군 병장 작대기처럼 이마에 네 가닥 주름살이 깊이 깊이 팬 노인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그 아들뻘되는 사람이 앉아 있었구요. 처음에는 일행인가 했는데 먼저 일어나 셈을 치러서 단순한 합석임을 알았지요. 그런데 그가 아주머니에게 조금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저기 저 노인 양반 밥값 내가 낼께요. 아버지 생각이 나서......"
앗. 이렇게 따스한 미담이 발생하다니...... 저는 즉시 카메라를 들고 총총 가게문을 나선 효자(?)의 뒤를 추격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인터뷰를 완강히 거절했지요.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어떻게든 설득을 해 볼 양으로 말을 붙여 봤습니다.
"아까 그 노인이 아버지를 닮으셨나 봐요?"
"닮았냐구요? 글쎄요 난 아버지 얼굴을 못봐서....."
"네? 아니 아까 아버지 생각난다고.... 밥값 대신 내 주셨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내가 뱃속에 있을 때 전쟁에 나가서 행방불명되셨어요. 난 아버지를 스무살 청년 얼굴 사진으로밖에 모르지. 생각이 나는 건 어머니가 아버지 생신날 제사를 드렸는데 그때 콩비지를 꼭 해서 올려 주셨어요. 그렇게 좋아하시는 음식이었다두만."
"네에.... 그런데 듣기로 콩비지는 이북 음식인데.....고향이 이북이세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어떻게든 아저씨의 인터뷰를 끌어내려고 애쓰는 제게 이제 초로에 접어든 전쟁 유복자는 아주 난처한 상대를 만났다는 듯 제 눈길을 피하며 말했습니다.
"인민군이었어요. 그래서 인터뷰 하기 싫은 거요. 그럼 안녕히 계슈. 미안하우."
혹시 자기 옷자락을 잡고 인터뷰를 청할까 두려워라도 했는지 그는 뛰다시피 가게 앞을 떠났습니다만 저는 한 대 맞은 듯 멍하니 그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인민군의 유복자가 어떤 인생유전을 거쳐 서울 한복판의 콩비지 식당에서 저와 조우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점심 식사 시간, 앞에서 콩비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던 한 노인의 얼굴에 스무살 청년으로만 남은 아버지를 오버랩시킨 한 아들의 애틋함은 저녁놀처럼 붉게 제 마음에 내려앉았지요.
십수년 전 옛 싸움터에서 어느 유골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이 생생하게 발견되어 수십년만에 그 가족에게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고등고시를 준비 중이었다는 아주 잘생기고 총명해 보이는 사진은 50년 동안이나 땅에 파묻힌 채 햇볕 보기를 기다렸겠죠. 그리고 그 사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유골들은 자신이 파묻힌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돌아간 날도 모른채 자신의 생일에 제사밥을 올리는 가족들의 곁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겠지요.
육십갑자가 한 바퀴 돌고 또 십 수년이 지난 오늘, 역사의 파도에 휩쓸려 버린 잘생긴 고시생의 사진, 그리고 그날 한 노인을 대신해 밥값을 낸 이름 모를 이의 얼굴을 교차시키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쟁은 아직 우리 곁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거니와, 절대로 다시는 상종 말아야 할 몹쓸 것이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