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5월 6일 박수근 사망 천생연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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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미술품 경매 가격 가운데 최고가는 얼마일까요. 예술 작품에 화폐 가치를 대뜸 들이미는 것이 얼마나 천박한 일인지는 익히 압니다. 그래도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참람한 핑계로 경매 가격 랭킹을 슬쩍 들춰 보면 1위부터 6위까지를 한 이름이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미술가 김환기죠. (머니투데이 2008년 1월 3일자) 하지만 2007년부터 2015년까지 꽤 긴 세월 동안 국내 미술 작품 최고 경매 가격의 주인공은 현재 역대 7위에 랭크된 박수근의 <빨래터>였지요. 경매가 45억 2천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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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박수근 화백이 기록한 ‘국내 최고’는 그게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2006년 말 그의 작품 <노상>이 10억원을 돌파해 ‘국내 최고’를 기록했고 이건 불과 석 달만에 작품 <시장의 사람들>이 25억을 가뿐히 넘어 또 한 번 국내 최고의 타이틀을 휘감았지요. 이어 2007년 <빨래터>가 42억 5천만원을 기록했던 것이니 그야말로 ‘점프컷’처럼 그 작품 가격이 뛰어올랐던 셈입니다. 박수근의 알려지지 않은 걸작이 홀연 등장한다면 김환기의 작품들을 물리고 국내 최고 경매 가격인 65억 5천만원 (김환기의 <고요 5 IV 73 #310>)을 능가하는 금액이 어른거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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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 보면 그 가족들은 떼돈을 벌었겠다고요?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다고 합니다. 워낙 어려웠던 시절 그 그림들을 싼값에 팔아 치워야 했기 때문에 돈벼락은 애먼 사람이 맞았죠. 이를테면 박수근의 걸작 <시장 사람들>의 첫 주인은 주한미군이었습니다. 그가 다른 소품과 함께 이 작품 구입에 들인 돈은 단돈 320달러였다지요. 이를 수십 년 소장하다가 한국인에게 되팔았을 때 가격은 15~19억원이었다니 그 ‘대박’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화가 박수근은 “ 우리 민족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서민 화가이자 20세기 가장 한국적인 화가”라고 평가되는 사람입니다. “단순한 선묘를 이용하여 대상의 본질을 부각시키고 거친 화강암 같은 재질감으로 표현해 냄으로써 한국적인 미의 전형을 이루어냈다.”는 평도 따라다니지요. 박수근의 예술 세계에 대한 이 이상의 설명은 역시 가뿐하게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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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로서의 재능이나 국내 최고의 경매 금액 등등도 그렇지만 박수근은 또 하나 매력적이고 구성진 화제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바로 아내 김복순과의 러브 스토리지요. 박수근은 강원도 양구에서 위로 누나가 셋 있는 넉넉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년운은 그야말로 귀남이 그 자체였겠으나 귀한 팔자는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벌이던 사업이 쪽박을 차고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나이 열 두 살에 밀레의 <만종>을 보고 번갯불에 맞은 듯 감동하고 나도 화가가 되리라 결심했던, 일본인 교장이 감탄할 만큼의 재능을 발휘하여 젊은 나이에 크고 작은 상도 여러 번 탔던 예술 청년 박수근이었습니다만, 기울어버린 가세는 그에게 큰 짐이 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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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계모와 함께 강원도 금성에 시계 수리점을 차립니다. 그림 공부하느라 춘천에 나와 있던 박수근이 아버지 집에 다니러 왔던 어느 날 박수근은 밀레의 <만종>을 봤을 때처럼, 또 한 번 번갯불이 온몸을 때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웃집의 나이 열 일곱 살 처자를 봤기 때문이었지요. 그녀는 행세깨나 하는 집의 장녀였는데 역시 어머니를 일찍 여읜 처지였다지요, 박수근의 계모도 이 처자를 좋게 봐서 은근히 밀어 줬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말이죠. “와서 한 번 찬찬히 봐. 내 그 처자랑 같이 빨래갈 테니까. 점심밥 가져오는 척 하면서 응?” 박수근은 그렇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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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여인들이 저마다 수북이 빨래짐 들고 와서 방망이 두들겨 흰 빨래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며 온갖 수다를 떨고 웃음꽃 피는 곳, 그곳에서 박수근은 김복순을 마음 깊숙이 담게 됩니다. “일전에 당신이 우리 어머니와 빨래를 하러 같이 가셨을 때 어머니 점심을 가져간다는 핑계로 빨래터에서 당신을 자세히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려고 마음을 결정했습니다. -1939년 가을.” (박수근의 편지, 서울신문 2009년 5월 14일자) 아내를 자신의 배필로 (혼자서나마) 결정했던 운명의 장소이기 때문이었는지 박수근은 빨래터를 여러 번 화폭에 남깁니다. 확인된 것만 여섯 점이라고 하니까요. 고호가 해바라기를 즐겨 그렸듯 박수근은 빨래터에서의 아내를 두고두고 잊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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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아는 방법이 몇 가지가 있다고 하지요. 누구는 고스톱을 쳐 보면 안다고도 하고 술을 먹어 보라고도 합니다. 제게 하나를 들라면, 좀 어렵고 은밀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 사람의 연애 편지를 훔쳐 보면 그 사람을 대번에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본의 아니게 읽게 됐거나 자랑 또는 평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합법적으로’ 봤던 연애편지들은 쓴 사람의 성격과 인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거든요. 그럼 박수근이 쓴 연애 편지 한 번 들여다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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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 편지를 보내오니 용서하시고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 부농가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고운 옷에 갓신만 신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의 광산 사업이 실패하고 물에 전답이 떠내려가서 우리집은 그만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나는 춘천과 서울로 다니면서 그림공부를 독학했습니다. 지금까지 다섯번 선전에 입선을 했습니다. 선전(鮮展)에 처음 처녀 입선한 것은 내가 18세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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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춘천에서 그림공부를 하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오니 부모님께서 윗집 처녀에게 장가들라고 권하셨습니다. 나는 여러 번 거절했습니다. 내가 더 성공해서 결혼할 생각이었으나 부모님께서 하도 권하셔서 나는 당신에 대해 내동생 원근(元根)이와 동네 사람들에게 알아보았습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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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론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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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당신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은 당신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나는 나 혼자 당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나의 이 숨김없는 고백을 들으시고, 당신도 당신의 심정을 솔직히 적어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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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신지요? 그림 재주 만큼 글재주 넘친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만 뭔가를 숨기기에는 속이 훤히 들여다 뵈고, 어느 추위에도 손을 잡으면 그 손이 따뜻할 듯한, 뭉툭하고 우직한 남자 하나가 여자의 ‘하회를 기다리며’ 조마조마하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이 청년이 마음을 졸일만도 한 것이 빨래터의 그 여인은 부잣집 장녀였어요. 즉 학교도 제대로 안나온 가난한 ‘환쟁이’ (화가를 낮춰 부르던 이름)에게 시집갈 이유는 별로 없었다는 뜻이죠. 거기에 결혼 생활 오랜만에 낳은 첫딸로 아버지에겐 무척 애틋한 자식이었거든요. 그러나 천생연분은 있습니다. 글쎄 이 부잣집의 장녀는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기도를 해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이 다음에 커서 제가 시집을 갈 때에는 우리처럼 부잣집으로 시집보내지 마시고, 하루 세끼 조죽을 끓여 먹어도 좋으니 예수님 믿고 깨끗하게 사는 집으로 시집가게 해주세요.” 아마도 아버지가 무척 방탕한 모습을 보였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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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그만 사달이 났습니다. 박수근의 편지가 아버지에게 발각된 거지요. 가난뱅이 ‘환쟁이’가 딸을 넘본다는 걸 안 아버지는 격노합니다. “누가 이런 편지를 받으라더냐.” 고함을 지르며 딸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에 이르죠. 이 소란통에 이웃집에 살던 박수근의 부모도 뛰쳐나와 발을 동동 굴렀답니다. 김복순의 아버지는 당장 춘천의 의사 집에 혼담을 넣고 결혼을 서둘렀습니다. 예물이 오가고 가구를 맞추고 부산하게 돌아가는데 김복순의 집에 분노에 찬 방문객이 들이닥칩니다. 박수근의 아버지였지요, 소식을 들은 박수근이 몸져 누웠고 박수근의 아버지는 사생결단을 낼 각오로 김복순의 집 대문을 박차고 들어온 거지요. “내 아들이 병신이요 뭐요. 우리를 가난하다고 업신여기지 마시오. 우리 아들이 죽으면 당신 딸은 좋을 게 뭐요.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저들의 분복(分福)에 달렸지, 너무 사람을 멸시하지 마시오.” 결국 김복순의 아버지는 박수근과의 결혼을 허락합니다. 고이 기른 딸을 가난한 화가에게 시집보낸다는 생각에 아버지는 펑펑 눈물을 흘리는데 김복순은 자신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셨다는 생각에 속으로 기뻐해 마지않았다고 하니 참 사람 인연은 묘한 거지요. 그런데 결혼을 앞두고 박수근은 또 한 번 탈이 납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지내던 그가 결혼 성사 소식에 벌떡 일어나서 밥을 와구와구 먹다가 그게 그만 체해 버린 거지요.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키득거리게 됩니다만, 웃음의 끝머리에 코끝이 찡해 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얼마나 좋으면 그랬을까요. 얼마나 사랑이 사무치면 그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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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순의 친정 아버지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이 가난한 화가와 살면서 무진 고생을 할 것을 예감했고 그 예감은 그림같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실제로 박수근 부부의 삶은 신산(辛酸) 그 자체였지요. 전쟁과 가난 와중에 아들 둘을 잃는 슬픔을 겪었고 박수근은 예술적 자존심을 꺾고 미군 px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며 연명해야 했으며 후일 수십억 가치를 상회할 그의 그림들을 몇 끼니의 쌀값과 바꾸며 살아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평생토록 변치 않았던 건 저 담담하면서도 절절한 연애 편지로 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박수근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었습니다. 아내 김복순은 박수근에게 그저 알파이자 오메가였고 최고의 여신이자 최상의 모델이었고 나이가 들어도 식지 않는 사랑의 대상이었던 겁니다. 김복순 본인의 회고를 들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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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는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해 주셨는지 마치 잃었던 보물이라도 얻은 양 애지중지 보살펴 주신 것이다. 또 너무나 진중하시고 점잖은 분이어서 남편이라기보다는 어머니 같고 오빠와도 같은 분으로 한없이 존경의 념을 갖게 하는 분이었다.” 여자가 남자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 ‘아버지 같았다’는 표현은 여러 번 들었지만 남편을 두고 ‘어머니같은 분’이라고 하는 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남편에게서 어머니를 느낄 정도라면 박수근은 얼마나 김복순이라는 사람을 따뜻이 품고 쓰다듬고 어루만졌던 걸까요.
평양에서 그림 공부를 하는 등 떨어져 있을 때 부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아니 하루에도 몇 통씩 편지를 교환했습니다. 우체부로부터 “편지를 이렇게 매일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어디 있소?” 하는 하소연 섞인 불평을 들었고 시어머니가 “직장에서 타는 봉급으로 우표값 당하지 못할 테니 매일 하는 편지 끊으라고 전해라.”고 안달을 할 만큼 말입니다. 시어머니의 말을 전해들은 남편은 이런 답장을 보내 옵니다. “우표는 도청 것을 쓰고 제 돈으로는 사서 쓰지 않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집에서 드는 우표값이 염려가 되신다면 제가 늘 계속해서 우표를 보내겠어요.” 아마 박수근의 계모 역시 두 손을 번쩍 들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졌다 졌어!” 이 글을 쓰면서도 제 입에서 “졌다 졌어”가 나올 정도니까요.
여러 인물들의 러브 스토리를 들추고 엿보아 왔습니다만 박수근과 김복순 부부가 서로를 보듬는 마음만큼 애틋하고 울림이 큰 사랑은 없는 것 같습니다. 천생연분, 즉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만나고 사랑하도록 하늘이 정해 주었구나 싶다고나 할까요. 태평양 전쟁 말기에 극심한 생활고 때문에 아내가 젖먹이 아들을 들처업고 뙤약볕 밑에서 일을 해야 하던 시절, 갑자기 박수근이 양산을 들고 나타납니다. 이건 당신 꺼라며. 끼니도 잇기 힘든 판에 웬 양산이냐 이게 어찌 된 거냐고 캐묻는 아내 앞에서 박수근의 맥없는 대답은 이랬습니다. “당신이 뙤약볕에서 너무 힘들게 오가는 게 가슴 아파서.... 어느 상점에서.... 훔쳐 온 거요.”
아내는 “눈물이 흐르고 가슴에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으면서도 한숨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 마음이야 가슴 속을 박박 긁어 고마워한들 답이 될까만, 저렇게 마음 약한 사람이 자신을 위해 도둑질을 했다는 사실이 비수가 되어 박힌 거지요. 부부는 실랑이를 벌입니다. “일본 사람 가게요. 우리 나라 빼앗고 떼돈을 벌고 있는 일본 가게 것이니 그냥 쓰시오.” “안돼요 저는 그거 못써요. 돌려 주세요.”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 남편이 돌아간 뒤에도 아내가 “그 뜨거운 사랑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라고 술회한 것이 넉넉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아들의 회고를 들으면 그 부부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얼마나 서로를 즐겁게 하면서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노래를 못하신다. 노래할 일이 생기면 아버지의 표정은 굳어진다. 어머니는 이런 표정을 재미있어 한다. 성화에 못 이겨 하모니카로 노래를 대신한다. 뻐꾹 왈츠서부터 신나게 서너 곡 불어 젖힌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음악 소녀가 된다. 정말 아버지의 뻐꾹 왈츠는 신나는 곡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은 엄마 닮으면 어여쁜 앵무새가 되고 아버지를 닮으면 총대 없는 뻐꾸기 병정이 되곤 한다.”
노래를 못한다며 타박을 하면 씰룩거리면서 인상 구기는 남편. 그걸 보며 깔깔대는 아내. 우쒸 하면서 하모니카를 꺼내서는 신나게 불어대면 또 거기에 맞춰 종달새처럼 노래하는 아내. 상상의 나래를 펼쳐 이 행복한 풍경을 그리다 보면 그저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질 뿐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리도 좋은 일이로구나 싶지요. 수십 년 시공간의 차이를 넘어서 행복의 온기가 시나브로 전해져 오는 느낌이란 드물고도 귀한 일이지요. 앤드류 카네기가 그랬던가요. “성공이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고 행복이란 당신이 얻은 것을 바라는 일이다.”
박수근의 유언은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하긴 보통 사람들은 죽음에 임하면 반대로 말합니다. 천국이 먼 줄 알았는데 가깝다고..... 박수근이 그렇게 얘기한 것은 아내와의 한평생이 비록 힘들고 맵고 버거운 시대에 걸쳐 있었다 해도 그럴 수 없이 행복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게 천국이었던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