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팀의 세계 제패

sanha8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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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29일 남북의 세계 제패 .

대학에 들어가서 낯선 것 중의 하나가 ‘연호’(年號)였다. 적잖이 비장한(?) 연호들이 대자보와 과 학회지와 심지어 자판기 일회용 컵에까지 수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본 연호는 ‘분단조국’이라는 연호였다. 내가 입학했던 1988년은 ‘분단조국’ 44년이었다.

이런 분단 조국의 역사 속에서 남북이 계속 으르렁거리는 와중에도 ‘정치와 무관한’(글쎄? 아무튼) 스포츠만큼은 힘을 합쳐 보자는 논의가 나온 것은 꽤 오래전부터였다. 1964년 도쿄(동경)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권유를 받은 남북은 단일팀 구성을 위해 머리를 맞댔으나 결국 결렬됐다. 하지만 당시 합의된 항목 가운데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 “국가(國歌)는 해방 이전의 ‘아리랑’으로 한다.” 이 합의는 수십년 동안 지하에 묻혀 있다가 90년대 들어 샘물처럼 솟아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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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방북 파동 (문익환 목사, 임수경 학생) 으로 80년대 끝자락의 남북관계는 매우 험악했지만 90년대가 동터오면서 남북은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분위기가 사뭇 바뀌고 있음을 극적으로 드러낸 사건은 1990년 베이징(북경) 아시안게임이었다. 이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남북은 그놈의 ‘단일팀’을 위해 협의를 계속한다. 팀의 깃발을 정하는 일부터 난항이었다.

남측은 흰색 바탕에 녹색 한반도가 그려지고 그 아래에 KOREA라는 문구를 새긴 기를 제시했고 북측은 흰색 바탕에 황토색 한반도에다 KORYO, 즉 ‘고려’를 영문으로 새긴 기를 제시했다. 그놈의 색깔이 뭐라고 치열하게 맞서던 남과 북은 결국 흰색 바탕에 파란색 한반도 지도가 새겨진 깃발로 합의를 도출해 낸다. 지금도 간간이 누군가의 손에 들려 펄럭이는 한반도기의 탄생이었다. 끝내 아시안게임에 남북 단일팀을 내보내지는 못했지만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남북은 ‘합동응원’의 형태로 작은 통일을 이뤄내게 된다.

북한 응원단장이 남한 응원단을 찾기도 했고 남한 응원단을 이끌던 뽀빠이 이상용은 북한 응원단 앞으로 뛰어들어 열렬한 박수를 받기도 했다. 뽀빠이 아저씨와 농악대 옷을 입은 북한 응원단이 뜨겁게 끌어안은 사진은 보는 사람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생각해 보면 참 쉬운 일인데 어찌 그리 어려웠던가 말이다.

베이징 아시안게임 이후 남과 북의 국가대표팀이 서울과 평양을 각각 방문하여 치르는 통일축구대회가 성사된다.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 직후 행해졌던 ‘경평전’의 부활이었다. 남북의 화해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었다. 1991년, 즉 분단조국 47년 4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단일팀을 출격시키는 데에 합의한다.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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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여자 탁구에 쏠렸다. 여자 탁구에 관한 한 중국은 세계 최강이라는 수식어도 모자라는 우주 최강의 만리장성이었다. 그나마 개인전에서는 간혹 중국을 꺾는 개가를 올린 적도 있었지만 단체전에서 중국을 꺾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중국은 단체전 8연패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에리사라는 스타를 내세워 한국 대표팀이 단체전에서 중국을 꺾은 적도 있지만 그 이후 단 한 번도 중국은 우승컵을 놓치지 않았다. 수십년 동안 탁구 좀 친다는 남과 북 모두에게 중국은 요즘 인터넷 용어로 ‘넘사벽’이었다.

영화 <코리아>에서 보듯 남과 북의 선수들이 갑자기 한 팀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분희 언니’라는 말에 ‘정화 동무’로 맞받는 어색함 속에서도 현정화, 홍차옥, 리분희, 유순복으로 이뤄진 남북 단일팀은 승승장구하면서 결승에 진출했다. 북한 선수들이 부담을 느끼던 유럽 선수들을 무너뜨린 것은 현정화였고, 간염에 걸린 몸을 무릅쓰고 분전하여 한국 선수들을 감동시킨 것은 리분희였다.

그리고 결승전. 상대는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이었다. 그 선봉에는 탁구의 마녀 덩야핑이 서 있었다. 일찍이 스포츠를 즐겼던 한국 사람들에게는 별로 떠올리기 싫은 몇몇 이름들이 있다. 이를테면 말레이시아 축구팀 골키퍼 아루무감(원숭이 같은 긴 팔로 한국 팀의 슛을 악착같이 막아내던), 중국의 여자 농구 헐크 천웨팡(진월방) 등등, 그 대열에서도 지긋지긋하게 빛나는 이름 덩야핑은 한국 선수들을 매번 좌절시켰던 ‘마녀’였고 이 마녀는 빗자루 대신 라켓을 타고 다니며 이후 세계대회 우승만 18번을 차지하는 대기록을 세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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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코리아> 속에서 '덩야링'. 덩야핑을 모델로 한 캐릭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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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마녀가 맥없이 거꾸러진다. 마녀를 물리친 것은 남한의 에이스 현정화도 아니고 북한의 고참 리분희도 아닌 홍안의 함경도 처녀 유순복이었다. 현정화에 따르면 “약 먹은 것처럼 공을 쳤다. 한 포인트를 따내곤 한 40~50㎝씩 점프를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약 먹었다는 표현이 틀리지도 않은 것이 그 후로 유순복이 언감생심 덩야핑을 물리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녀는 ‘약’을 먹었을 것이다. 사상 최초로 재일본민단과 총련이 한데 모여 환영 만찬을 베풀고, 경기장에서 한 깃발 아래에서 백발성성한 1세부터 우리말 서툰 3세들까지 코리아를 부르짖는 그 모든 분위기가 약이 아니면 무엇이었으랴.

현정화도 질 수 없다는 듯 중국 국내 선발전에서 두각을 나타낸 신예 가오쥔을 눌렀다. 게임 전적 2 대 0. 한 번만 더 이기면 우승이 눈앞에 있었지만 역시 중국은 중국이었다. 현정화·리분희 두 에이스가 나선 복식에서 졌고 현정화마저 중국의 덩야핑에게 덜미를 잡혔다. 다시 유순복이었다.

1991년 4월29일 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 결승전 마지막 경기에 나서는 유순복이 화면에 잡혔을 때 아련하게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아파트 아래층에서 함께 텔레비전을 지켜보는 가족들인 듯했다. “유순복! 유순복! 유순복!” 작달막하고 동그란, 현정화처럼 매섭지도 않고 리분희처럼 노련해 보이지도 않는 뭉툭한 처녀는 세계 랭킹 2위 가오쥔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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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복 선수

운명은 2세트에서 갈렸다. 유순복은 천리마의 기세로 백핸드를 휘두르고 속도전의 스피드로 스매시를 해 1세트를 따냈고, 2세트를 맞았는데 중국의 가오쥔은 2세트 들어서 막강한 ‘가오’를 잡기 시작했다. 유순복은 12 대 17까지 몰렸다. 가오쥔의 승리까지 4점을 남겨 둔 상황에서 갑자기 유순복은 또 약을 먹은 듯했다. 한 점 한 점 유순복은 거짓말처럼 따라붙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가 동점을 이뤘을 때를 나는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나 역시 ‘40~50센티미터의 점프’를 하며 펄쩍펄쩍 뛰고 있었던 것이다. 급기야 가오쥔을 잡아버린 순간에는 내가 마치 유순복인 양 마루에 드러누워 버렸다.

재일동포들은 하염없이 울면서 만세를 불렀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스탠드에 일어서서 무엇 만세인지 모를 만세를 부르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처음으로 이룬 단일팀이 중국을 꺾고 세계를 제패하다니. 참으로 상서로운 징조로 보였고, 문익환 목사님의 시구절 “통일은 됐어!”가 귀에 아른거렸다. 단일팀의 국가(노래)로 이미 30년 전에 결정된 바 있으나 처음으로 울려 퍼지는 ‘아리랑’을 따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린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분단조국 47년. 드디어 그 철의 세월은 중국의 만리장성을 거뜬히 넘은 코리아의 젊은 여성들의 손에 내동댕이쳐진 듯 보였다. 흰색 바탕의 하늘색 단일기는 가을 하늘보다도 높은 곳에서 청명하게 빛났다.

그러나 남북 단일팀의 추억은 딱 91년의 봄과 초여름 (세계 청소년 축구) 에 국한된 채 멈춰 버렸다. 털도 생생하고 상아도 찬연히 빛나지만 얼음 속에 갇힌 채 급속 냉동돼 버린 매머드 같은 신세라고나 할까. 그로부터 3년 뒤 남북은 불바다와 피바다의 협박을 교환하며 얼어붙었고 미국은 북한 핵을 빌미로 실제로 북한 공격 계획을 세우고 미국인들에 대한 소개령까지 내렸다. 그 이후 적대와 평화의 핑퐁게임, 무력충돌과 정상회담의 냉온탕을 오가는 세월 속에서 단일팀의 꿈은 사라졌다. 2018년 겨울 전까지는.

고락을 같이하며 세계를 놀라게 한 동료들과 아프게 헤어지고 그 뒤로는 만나지도 못한 선수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지바의 영웅 현정화 감독의 말은 그래서 서럽다.

“정치적인 이벤트를 할 바에야 차라리 단일팀 같은 거 하지 말고 각자 국가를 인정하고 사는 게 낫다는 마음이 굳혀졌다.......북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통일이 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장기적으로는 준비를 해서 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빠져서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도와줘야 한다. 정말로 손을 떼어버리는 상태까지 가면 안 되지 않나.”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 모두의 대표가 되어 세계를 제패했으나 눈물 흘리며 이별해야 했고 다시는 그날의 동료들과 마주하지 못한 한 탁구인의 탄식이었다. 1991년의 단일팀의 추억은 강렬한 달콤함으로 시작했다가 쓰디쓴 소태로 끝난다. 그로부터 근 27년 동안 우리는 그 소태를 뱉지 못했다. 2018년 동계 올림픽 때 말은 많았으나 탈은 별로 없었던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으로 다시금 그 달콤함을 되찾기 전까지 말이다. 이제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 보도를 보며 1991년 4월 29일을 떠올린다. 그날 정말.... 정말 감동이었는데. 미치도록 기뻤는데. 그 감동이 되풀이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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