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군의 비극. 경찰의 대학살

sanha8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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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4월 26일 경남 의령 경찰관 총기 난동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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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 난동 사건’이라는 이름 자체가 보도 지침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경남 의령군 궁류지소의 우범곤 순경은 술 한 잔 먹은 김에 빈 총 빼들고 누굴 죽이고 살리고 하면서 술주정한 ‘난동범’이 아니었다. 단 하룻밤 사이에 총알과 수류탄을 있는대로 부리고 다니면서 62명의 생목숨을 앗아간 살인마였다. ‘민간인 학살 사건’이라 불러야 마땅한 그의 행각이 ‘총기 난동 사건’으로 ‘마사지’ 된 것은 다분히 광주의 악몽을 기억하고 있던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 때문이었으리라. 한창 기네스북 번역본을 탐독한 적이 있었는데 역대 최악의 단독 '살인마'로서 '최단 시간 최다 살상'으로 기록된 이가 바로 이 우범곤이었다.

.동거녀와 결혼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등등의 이유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그가 낮잠을 청할 때 파리 한 마리가 그의 가슴에 앉았고 동거녀는 찰싹 하고 그의 가슴을 때렸다. 퍼뜩 잠에서 깨어난 우범곤은 동거녀와 시비가 붙었고, 그 행동을 자신을 무시한 것이라고 본 우범곤은 마침내 가슴 속에 내재되어 왔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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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동거녀의 뺨을 있는대로 올려 부쳤고 소리를 듣고 달려온 친척 여자까지도 구타했다. 다른 지역에서 근무할 때에도 술만 먹으면 사람이 눈이 돌아간다는 평을 들었던 우범곤은 몰려온 사람들이 자신을 탓하자 그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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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 반 경, 우범곤은 지서 무기고에서 카빈총 두 자루와 실탄 180발을, 또 부근 예비군 무기고에서 수류탄 7발을 탈취했다. 그 이후 그는 글자 그대로 악마가 돼 혼자만의 대학살극을 벌여 나가기 시작했다. 최초의 피살자는 지서 앞을 지나가던 젊은이였다. 멀쩡히 길을 가다 횡액을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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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우범곤의 행동은 우발적인 시작 치고는 지능적이었다. 우체국으로 가서 교환수와 집배원을 쏘아 죽이고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것이다. 날개를 단 해병대 특등사수 출신의 살인마 우범곤은 그야말로 활개를 치며 4개 마을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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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죽인 교환수의 집까지 구태여 찾아가 가족들을 몰살시키는가 하면 반상회하고 있던 곳에 들이닥쳐 난사를 퍼붓고 거기서 자신의 동거녀를 죽였다. 상가에 찾아가 부의금까지 내고 앉아설랑 신세한탄을 하다가 갑자기 총을 들고 사방에 대고 쏘아댔으며 콜라를 얻어마신 뒤 자신을 알아보는 학생을 죽이고 가게 아주머니까지도 죽였다. 한 가족이 몰살을 당해 열 살도 안된 꼬마가 상주를 맡아야 했던 집안도 있었고, 숫제 집안 식구들 모두가 죽음을 당한 집도 있었다. 돌도 안된 어린아이부터 일흔 살 할머니까지 우범곤은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 광란의 밤이 끝나가던 새벽 5시 반. 그는 수류탄으로 자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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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 후 2년이 안된 때였다. 광주의 살인마 전두환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일어난 데 대해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였고 궁류면에 거의 거국적인 지원을 퍼붓는다. 아마 요즘의 꼴통 우익들이 보면 “세금 도둑”이라고 팔뚝을 걷어붙일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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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닷새 만인 같은해 5월1일 부산지방검찰청 차장검사를 위원장으로 한 국가배상심의위원회는 사망자 1인당 최고 1900만원이 입금된 통장을 전달했다. 배상법에 따르면 사망자 가운데 60살 이상 노약자의 배상금은 83만5000원으로 결정됐으나, 배상위는 이 금액이 너무 적다며 최하 금액을 300만원으로 일괄조정해 지급했다.

또 배상금과 별도로 사망자 장례비 30만원과 조위금 600만원도 유족에게 건넸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유족에게 지급된 보상금은 사망자 1명당 최고 3200만원에 육박했다. 일가족 6명을 잃은 박아무개(당시 19살)씨는 가족 사망 보상금으로만 1억원이 넘는 돈을 받았다. 순경 초임자(군필자)의 한달치 급여가 13만3000원이던 시절이었다.

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사망자 배상금 지급일에 맞춰 현장을 찾아가 103억여원 규모의 ‘궁류마을장기개발계획’에 서명했다. 이 계획에는 궁류면 벽계리의 저수지에 둑을 새로 쌓고, 궁류에서 인근 시·군으로 연결되는 산골길을 모두 포장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시 정권은 이외에도 사망자 및 부상자 가족의 학비·의료비 면제, 예비군 훈련 연기 등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주민 지원 방안을 내놓았다. 전 대통령도 개인 자격으로 2억3900만원을 유가족 성금으로 내놓았다.“ (한겨레 2012년 4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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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을 얼마나 한들, 지역을 얼마나 개발해 준들 자식 잃고 부모 잃은 사람들의 슬픔을 달랠 수 있으랴.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생색으로나마 성의를 보였고 적극적으로 수습에 나섰으며 공무차 부산에 나가 있던 의령경찰서장을 직무유기로 고발하는 오버까지 했다가 후일 무죄를 받게 되는 등 책임자 처벌에도 앞장선다. 유족들의 손 한 번 제대로 잡아주지 않은 오늘날의 대통령보다는 훨 나았다고나 할까.

우범곤은 청와대에서도 근무한 경력이 있는 경찰관이었다. 그런 그가 경남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의령군 궁유지서로 발령이 떨어진 데는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술이었다. 술만 먹으면 하지만 그 일련의 과정에서 피해의식과 열등감으로 뭉쳐진 인간 다이나마이트가 되어 폭발했다. 쌓여가는 열등감과 고립된 분노가 폭발할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었던 사건이었다. 그나마 세상을 향하여 스스로 문 닫은 사람이 지금보다는 적었던 때였다. 외톨이였을망정 친구들이 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누군가 손 잡아 주면 깍두기로라도 오징어육보라도 하던 시기였다. 그래도 우범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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