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밤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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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생각나는 것들이 몇 개 있다. 한겨울에 밀짚모자 눈사람도 있고 조금 서구적으로 나가면 산타클로스와 루돌프가 썰매를 달릴 것이며 동짓날 팥죽 생각에 군침이 삼켜지기도 하고 따끈따끈 군고구마 있어요 소리에 귀가 당겨지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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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좀 덜하지만 기나긴 겨울밤의 상징 같은 것으로 군밤을 빼놓을 수 없다. 몇 해 전만 해도 퇴근 길 아버지들은 동네 어귀에 어김없이 들어앉아 있던 군밤장수들로부터 군밤 몇 봉지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일과였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군밤 까 먹으며 긴 밤을 채우는 일이 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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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 누군가 ‘군밤타령’을 흥얼거릴지도 모르겠다. .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연평 바다에/ 어허얼싸 돈 바람 분다. (후렴) 얼싸 좋네 아하 좋네/ 군밤이여 에라/ 생률밤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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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유명한 군밤 타령은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민요’라기보다는 20세기에 만들어진 ‘신민요’라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아리랑’의 가락과 가사가 영화 ‘아리랑’ 감독나운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듯 말이다. “1932년 녹음된 유성기 음반(Victor 49167A)에 <군밤타령>의 작곡자로 전수린(1907~1984)이 등장하고 있어 이 노래의 출발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민속문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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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우리에게 친숙한 밤은 언제부터 우리 곁에 있었을까? 지역에 따라 상당한 편차가 있는 것 같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부여(夫餘)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오곡이 잘 자라지만 오과 (복숭아, 자두, 살구, 밤, 대추)는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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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후한서 동이전이나 그 외 기록에 등장하는 바, 삼한 중의 하나인 마한(馬韓)에는 밤이 나는데 그 밤이 배(梨 )만하다고 적혀 있다. 대표적인 활엽수인 밤나무는 북만주 지역에서는 자라기 어려웠지만 ‘배만한 밤’이 언급될 만큼 남쪽 지역에서는 풍성하게 생산됐던 것 같다. (물론 여기서 배란 오늘날 우리가 먹는 배라기보다는 야생 돌배나무의 열매로 보아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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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고승 원효의 어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기도를 드리고 돌아오다가 산기가 와 남편의 옷을 장막 삼아 치고 아이를 낳는데 그 옷을 둘렀던 나무가 밤나무였다. 오늘날 5천원 지폐의 모델인 율곡 이이는 파주의 밤나무촌, 즉 율곡에서 그 아호를 따왔는데 그에게도 이런 전설이 따라붙고 있다. 어린 율곡의 집에 탁발승이 방문했는데 율곡을 보고 열 살이 되면 호환을 당할, 즉 호랑이에게 물려갈 상이라고 한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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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실색한 율곡의 아버지가 그를 모면할 방법을 묻는다. 이 스님은 밤나무 천 그루를 심으라고 했고 율곡의 부모는 비지땀을 흘리며 뒷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다. 율곡이 열 살 되었을 때 정말 험상궂은 승려가 방문해서 율곡을 데려가겠다고 했다. 호랑이가 승려로 변신하고 나타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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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 아버지는 의기양양 뒷산에 데려가 밤나무를 세는데 한 그루가 모자랐다. 율곡의 아버지가 당황하고 호랑이는 어서 아들을 내놓으라 호령을 하는데 어디선가 말이 들려왔다. “나도밤나무야.” 한 나무의 외침이었다. 이 말을 들은 호랑이는 아쉬워하며 물러났다는 것이다. 나도밤나무는 잎이 밤나무와 닮긴 했지만 완전히 다른 나무다. 하지만 이후 나도밤나무라고 불리게 됐다는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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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옛 이야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옛 사람들이 밤나무를 무척 소중히 생각했다는 것이겠다. 원효 같은 큰 인물이 그 그늘에서 태어났고 율곡을 불운한 운명으로부터 살려낸 공덕 있는 나무가 아닌가. 고려 시대 이미 밤나무는 뽕나무, 옻나무, 닥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등과 더불어 국가적 보호 수종(樹種)이었고 조선 시대의 헌법이라 할 경국대전에는 아예 관리들에게 밤나무를 보호할 임무를 부여하고 소홀할 경우 처벌하는 법규를 넣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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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 목재는 단단하여 좀체 부서지거나 부식되지 않아 그 수명이 길었기에 매우 유용했다. 특히 예법이 강조된 조선 시대에서 단단하고 오래 가는 밤나무는 신주를 만드는 데 썼다. 제사를 모시는 분들의 이름과 이력을 써야 하니 그 결이 고와야 하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갈라지거나 부서지지 않고 오랜 보관에도 거뜬해야 했는데, 이런 신주의 재료로는 밤나무 이상의 나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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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열매인 밤도 소중하기 이를데없는 존재였다. 동양의 제사에서 밤은 결코 빠지지 않는 제물이었으며 탄수화물과 단백질, 비타민이 풍부하고 칼슘, 철 등의 영양소도 많이 들어 있어 ‘완전 식품’의 명예로운 이름까지 얻고 있다. 곡식이 부족할 때는 식량 대용으로도 쓰였는데 1938년 9월 25일자 동아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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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삶아먹고 구워먹고 밤밥이나 지어먹는 것에 그치지 말고 이 밤에 대해 좀 더 연구를 한다면 훌륭한 음식물의 대용이 될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밤을 가루로 만들어 빵을 만드는데 밀가루빵보다는 맛도 좋거니와 영양도 좋으니까 조선에서도 식량 문제로 연구가 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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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중일전쟁이 한창이었고 식량 공출이 한창 진행돼 조선 사람들이 반은 배를 곯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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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차례 보호령이 내려졌지만 동시에 밤나무에 대한 세금이 혹독하게 부과되면서 사람들은 밤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했고 철도가 부설될 때 그 단단함으로 인해 침목으로 사용되면서 또 밤나무의 상당 수가 사라졌다. 더욱이 해방 이후 1958년 밤나무에 치명적인 밤나무혹벌이라는 해충의 창궐로 토종 밤나무가 전멸 상태에 이르는 참극을 겪게 된다. 일본 품종이 도입돼 현재 재배 품종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밤맛만 비교하자면 이전의 한국밤에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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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저자이자 조선 시대의 ‘식객’(食客)이라 할 허균은 그의 유명한 음식 탐방기인 ‘도문대작’ (屠門大嚼)에서 자신이 먹어 본 각지의 밤 가운데 밀양과 지리산 일대의 밤을 최고로 꼽고 있는데 지금도 이 지역에서는 밤이 풍족하게 생산되고 충청도 공주, 부여, 강원도 횡성 일대의 밤도 유명하다. 한창 수확철인 가을, 각지의 밤 생산 농가에서는 밤 줍기 체험도 한창이고 겨울이 오면 따끈따끈한 군불에 구워낸 군밤은 온 가족 모여앉은 식탁의 감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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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마무리하다보니 문득 비운의 임금 고종의 일화가 떠오른다. 몰락한 왕족의 아들이다보니 살림이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동네 군밤 장수에게 조금만 공짜로 달라고 졸랐으나 매번 퇴짜를 맞았고 갑자기 벼락치기로 임금이 된 뒤 첫 어명으로 “집 밖 군밤 장수를 죽여라. 나한테 한 번도 공짜로 주지 않았다.”고 일갈하여 신하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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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이 만류하여 군밤 장수는 목이 날아갈 위기를 모면했다고 하지만 군밤에 군침 흘리는 아이의 소망을 매정하게 잘랐던 자신의 박덕함을 가슴 쓸어내리며 후회했으리라. 다른 과일도 그렇지만 유독 군밤은 나눠 먹을 때 맛있다. 방 안에 둘러앉아 수저로 속을 파 긁어먹으면서, 또 뜨거움에 입천정을 데면서도 마냥 즐겁고 달콤한 맛. 군밤이 절실한 계절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