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6월 21일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날
“입장이 시작되었다. 예상치 못한 일은 정문을 들어설 때 일어났다. 정문 좌우로, 삼미 슈퍼스타즈 선수들이 길게 열을 지어 문을 들어서는 인천 팬들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수들은 ”고맙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는 평범한 인사말과 함께 입장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꼭 잡고 삼미 슈퍼스타즈 티셔츠와 야구모자 그리고 수건을 안겨 주...었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 클럽 - 박민규, 한겨레출판)
1985년 6월 21일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이름이 사라지기 직전, 그 이름으로 치러진 마지막 경기의 풍경이다. 마지막 경기의 선발은 얼마 전 세상을 뜬 너구리 장명부였다. 83년 30승의 영광을 일구었지만 이후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장명부는 이날 선발을 자청했다고 한다. 하기사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경기에 장명부가 나오지 않았다면 그것도 이상했을 것이다. 그 상대는 롯데 자이언츠였다. 하지만 슈퍼맨의 마지막 투혼도 거인의 뭇매질에 무위로 돌아갔다. 16대 6 참패였다.
앞서 언급한 박민규의 소설 탓도 있지만 삼미 슈퍼스타즈는 최약체에 별볼일 없는 팀으로서보다는 그 속에 뭔가를 감추고 있는, 그래서 약해 보이지만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도깨비팀’으로 기억된다. 그 연원은 출범 당시부터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쟁쟁한 기업들이 각각의 연고지를 확정한 가운데 서울 근처의 대도시인 인천과 강원도는 자신을 연고지로 할 기업들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인천의 경우 야구의 역사는 꽤 오래 됐으나 기이하게도 군산상고 광주일고로 대변되는 호남세나 경북고와 경남고로 대변되는 영남세에 비하면 그 빛이 현저하게 약했고, 강원도는 고교야구 본선 무대에서 그 지역 팀이 등장했던 기억조차 희미하다. 주판알 튕기기에 능한 기업들이 꼴찌를 도맡아 할 것이 뻔한 팀을 꾸릴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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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도 근거지로 하니 강원도 재벌 현대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올림픽에만 충실”의 핑계로 거절당했고 인천에 연고를 가진 대한항공도 잠깐 관심을 보이다가 기름값 비싸져서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발을 뺐다. 한국화장품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인천 빼고 5개 구단만으로 갈까 말까 고민을 할 때 뛰어든 것이 삼미였다. 당시 나이 서른 한 살의 김현철 회장이 우리가 인천 연고 팀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팀 나와라 와라와라 뚜욱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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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단 총 23명. 이건 대개 축구팀 인원이지 야구팀 인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 가운데 내로라 할 명망을 가진 선수는 거의 없었다. 국가대표 경력을 가진 선수도 없었다. 야구를 한 적은 있으나 빛을 보지 못하고 삼미특수강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왼손 투수가 없다는 이유로 급거 특채(?)된 감사용이 그 가운데에서 가장 특이한 이력이었달까.
감독 선정도 도깨비 구단다왔다. 초대 감독은 박현식이었다. 그는 실업야구에서 112개의 홈런을 때려내 한국의 ‘베이브 루스’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었던 인천야구의 대부이기는 했다. 그런데 제일은행 부평 지점장으로 아주 잘 나가시고 계셨다. 왕년의 박현식 지점장이라는 소리에 예금고도 쑥쑥 늘었고 전도도 유망했다. 그런데 구단주 김현철은 인천에서 학교를 나온 제일은행 은행장을 공략했고 박현식은 결국 “전력이 너무 약해서 그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뭘 하겠느냐.”는 초대 슈퍼스타 없는 슈퍼스타즈 감독이 된다.
취임 감독의 일성도 재미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우승이 아니라 야구를 통한 ‘정신수양’ (!?#$%)”
그런데 그렇게 정성들여 모신 것 치고는 허무하게 5개월만에 잘라 버리는 도깨비 짓을 벌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해 후기리그에서 삼미 슈퍼스타즈는 단 5승을 한다. 기이하게도 상대는 주로 롯데와 해태였다. 그래서 “과자만 좋아하는 아기 슈퍼맨”이라는 키득거림도 있었다.
그 뒤에 등장한 감독이 또 하나의 인천 야구의 대부 김진영이었다. ‘미스터 인천’ 김경기선수의 아버지이기도 한 분이다. 83년 이분의 지휘 하에, 그리고 일본에서 비행기 타고 날아온 꼬리 아홉 달린 너구리 장명부의 호투 아래 삼미 슈퍼스타즈는 연승 가도를 내달린다. 이상윤의 해태 타이거즈와 엎치락뒤치락 우승을 다툴 무렵, 1983년 봄 크나큰 사태가 발생한다. 요즘은 심판과 신체적 접촉이 있으면 바로 퇴장이기에 별로 볼 수 없지만 왕년의 프로야구에서는 ‘배치기’가 꽤 많았다.
즉 심판 판정에 불만이 있는 경우 행여 주먹질을 포기한다는 뜻으로 뒷짐을 진 채 심판에게 배를 내밀고 달라붙는 일이 흔했던 것이다. 김진영 감독도 비슷하게 행동하다가 분을 못참고 조금 과잉된 행동을 했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다. 경기를 지켜보던 ‘어느 고위층 인사’가 “저거 구속시켜.”라고 한 마디를 했고, 결국 김진영 감독은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야구만큼은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하게 해 줘서 전라도 지역의 인심을 무마하려고 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쑥덕거림도 있고, ‘폭력시위’에 알레르기가 있던 정권이 폭력엄단의 시범 케이스로 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내막은 누구도 모른다. 결국 삼미 슈퍼스타즈는 남아 있던 12경기에서 3승 9패를 함으로써 우승권에서 멀어진다. 도깨비도 혀를 빼물 일이었다. 그 후 삼미 슈퍼스타즈는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도깨비도 한 철이었다.
애써 영입해 온 타격왕 (4할!!) 백인천은 간통죄로 감옥으로 갔고 장명부는 85년 시즌 최대 패라 할 25패를 하는 수모를 겪는다. 의욕 넘치게 뛰어들었던 구단주 김현철도 진절머리가 났는지 구단을 팔아치울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슈퍼스타즈를 인수하게 된 기업도 매우 도깨비스런 기업이었다. 딱 몇 년 이름이 회자되다가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기업, ‘청와대 X지’라는 매우 정치적으로 야시끼리한 별명을 소유한 청보가 삼미 슈퍼스타즈의 주인이 된 것이다.
120승 4무 211패. 삼미 슈퍼스타즈 도깨비팀의 총 전적이다. 그들의 유니폼에 새겨졌던 왕별을 떠올리면 슬몃 미소를 짓게 된다. 만년 꼴찌, 그러나 그 누구도 방심할 수는 없었던 팀, 그리고 이름을 운위하며 키득거렸던 선수들, 금광옥, 김바위, 정구왕, 감사용, 인호봉 등등의 이름들이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어린이 회원에 가입할라 하다가 어머니한테 된통 혼나고 물러섰던 내 유년과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