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8일 천연두 박멸의 날, 대륙의 공민왕 -순치제와 동악비
왕년에 빌려보던 비디오 테이프 앞에 항상 나오던 문화체육부나 무슨 건전문화인가 뭔가 협의회 제공의 영상 기억나지? 거기 나오는 매우 중후한 멘트도 떠오르겠지?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 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 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비행청소년 제조 혐의를 비디오에 갖다 붙이는 이 멘트의 황망함은 일단 차치하기로 하고. 일단 ‘마마’에 집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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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가 ‘천연ㅈ두’라는 병이라는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겠지. 천연두가 얼마나 무서웠으면 상감마마에 붙이는 ‘마마’를 붙였겠어. 우리가 학을 ‘뗀다’고 하지? 학질은 ‘떼는’ 병이었지만 ‘마마’는 ‘보내 드려야'’ 하는 병이었고 아이가 병에 걸리면 아버지가 외출할 때 아이 앞에 가서 의관 정제하고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고 나갈 정도였대. 마마님께 인사를 한 거지. 1980년 5월 8일 국제보건기구 WHO는 천연두의 박멸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인류가 한 질병으로부터 승리를 거둔 거지. 그러나 그 승리에는 너무나 많은 희생이 깔려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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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인도에서도 그리고 극동의 우리 땅에도 천연두는 때 되면 발생하는 태풍처럼 발병하고 유행하여 마치 ‘인구 조절자’같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 새롭게 이 병에 접하는 사람들은 더 심했어. 이를테면 망한 백제를 도우러 왔던 일본 응원군들이 천연두를 옮아가서 교토 인구의 반이 없어졌다고 해. 가장 유명한 사례는 역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겠지. 콜롬부스 이후 들이닥친 유럽인들이 들여온 천연두균에 의해 수천만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야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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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를 세운 만주족들은 천연두의 공포로부터 좀 자유로운 편이었어. 그네들이 살던 만주 북쪽이 추운 곳인데다 인구도 드문드문해서 전염병인 천연두가 창궐한 적이 없었던 거지. 그런데 이 사람들이 흥성해서 인구가 그득 들어찬 중국을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하면서 이들 역시 천연두의 공포와 마주하게 된다.
보통 천연두의 치사율은 30퍼센트 정도지만 전혀 내성이 없는 인디언들이 죄 죽었듯 초기 만주족의 천연두 치사율은 80퍼센트에 이르렀어. 후일 개국공신 중 공이 가장 크다고 표현되는 예친왕 (황제의 아들을 친왕이라고 하지. 아래 도르곤도 예친왕인데 한자가 다르다) 도도나 누르하치의 자손들 여럿이 천연두로 맥없이 죽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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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을 처음으로 함락한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은 천연두 기미만 보이면 성 밖으로 내치는 정책을 취했고 천연두가 유행하는 기미만 보이면 황제조차 자유롭게 나다니지 못하고 궁 안에 고립돼야 했어. 이 도르곤이 내세운 황제가 세조 순치제(順治帝)라는 황제다. 나이 열 두 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도르곤이 섭정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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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치제는 한 여자에게 꽂혀서 열렬히 사랑했던 로맨티스트이기도 해. 굳이 비교를 하자면 고려 공민왕을 생각하면 될 거다. 황후도 두 명에 후궁도 열 다섯이었지만 “내 사랑은 오직 동악비”였지. 동악은 성(姓)이다. 중국 드라마 가끔 보는 사람들은 어어 그 여자 할 거야. 순치제와 동악비는 중국 드라마의 주요한 소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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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한 장면
그런데 이 동악비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을 정도로 미스테리에 휩싸여 있다. 정사에 따르자면 만주 귀족의 딸이지만 궁에 들어올 때 나이가 이미 18살. 열 세 살에서 열 여섯 살 정도까지로 규정돼 있던 후궁 선발 연령을 웃돌았거든, 즉 노처녀였던 거야. 근데 그렇게 들어와서 아이도 낳지 않고 황귀비가 되고 순치제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일단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고 이 수수께끼의 연못에서는 많은 설화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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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설화에서는 그녀가 유명한 강남의 기생 동소완이었고 청나라 장군에 체포돼서 첩이 되라는 강요를 받지만 끝내 거절하고 황제에게 바쳐졌다는 그럴듯한 얘기가 있어. 단점이 있다면 동소완의 호적상 나이가 황제보다 열 네 살 위라는 데에 있지만 말이야. 아무리 연상에 꽂히더라도 황제가 열 네 살 위 여자에게 그러긴 좀 쉽지 않겠지? 유력한 설은 청나라의 많았던 친왕 (황족)의 부인이라는 거야. 친왕의 부인들이 궁에 들어와 황후나 후궁들의 시중을 드는 일이 있었는데 그러다가 동악비는 황제와 눈이 맞았고 이걸 가지고 남편이 트집을 잡자 황제가 몸소 그 뺨을 때리는 등 모욕을 줬고 남편은 그예 분통 터져 자결해 버렸다는 얘기도 전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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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순치제의 황후들은 몽골 여자였는데 몽골 여자들 좀 드세거든. 쿠빌라이의 딸이자 고려에 시집온 제국대장공주는 남편 충렬왕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도 했으니까. 그래도 뽑혀 온 황후들로서 그리 품성이 나쁘진 않았다는데 순치제는 영 마뜩지 않아했고 동악비를 만난 이후는 그녀에게 푹 빠져 버리지. 동악비 역시 착한 여자였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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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나라 일로 밤을 지샐 때 함께 묵묵히 있어 줬고 모든 면에 극진했다는 건 뭐 ‘성은을 입는’ 후궁들이 할 수 있다고 치는데 그녀는 어린 궁녀나 환관들이 실수를 하고 벌을 받게 됐을 때 대신 나서서 용서를 빌어 주었다고 해. 냉혹한 권력 다툼과 숨가쁜 대륙 쟁탈전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섭정왕의 위세에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순치제는 이 따뜻한 여자에게 끝없이 빠져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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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치제 초상.... 순하게 생겼지?
마침내 그녀는 아들을 낳아. 순치제는 순서상 넷째 아들인 이 아이를 두고 “짐의 첫 번째 아들”이라는 어마무시한 소리를 하며 황태자에 봉하려고 서둘렀을 정도. 아무리 장자 우선의 원칙이 없던 만주족이라고는 하지만 경악할만한 일이었지. 그러나 이 강보에 싸인 황태자가 곧 죽어버리면서 순치제와 동악비는 크나큰 슬픔에 빠진다. (중국 드라마에선 이 황태자의 죽음에 대해 독살 등 여러 스토리를 꾸미는 거 같더군) 이 몸도 맘도 쇠약해진 동악비를 엄습한 게 천연두였어. 동악비는 그만 허무하게 죽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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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순치제가 보여준 행동은 거의 노국공주 잃은 공민왕급이야. 노국공주 초상화를 열렬히 그려대던 공민왕처럼 순치제는 4천자에 달하는 장문의 추도사를 본인이 직접 쓰고 읽어. 그리고 5일 동안이나 정사를 보지 않으며 슬피 울었고 심지어 동악비를 위해 울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는 역시 어마무시한 소리를 할 정도로 정신줄을 놔 버리지. 그리고 그녀를 황후로 추존한다. 대신들이 법에 어긋난다고 반대했지만 사랑을 잃은 황제에게 거칠 것은 없었지. ‘효헌단경황후’ 그녀의 시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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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치제는 그녀의 죽음 후 모든 의욕을 상실한 듯 보이고 (마치 공민왕처럼!) 4개월 뒤 동악비의 뒤를 따라 죽는다. 정사에 따르면 사인은 또 천연두였어. 순치제는 독일 출신의 선교사 아담 샬 (탕약망이라는 중국 이름을 가졌고 조선 인조의 아들 소현 세자와도 친분이 있었던)과 절친했었다. 아담 샬의 집에 무시로 방문하는가 하면 언제든 황제를 만날 수 있는 특권도 주었고 때로는 얼굴을 붉히며 토론도 하고 격의없는 농담도 주고받는 그야말로 ‘특수관계’에 있었다고 해. 순치제는 죽음을 앞두고 누구를 후사로 삼으면 좋을지 아담 샬에게 물었다는군.
그때 아담 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셋째 현엽을 후사로 삼으십시오.”였대. 이유는? 바로 그는 천연두를 앓고도 살아났던, 비록 곰보긴 했지만 천연두를 다시 앓을 일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바로 이 곰보가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꼽히는 성조 강희제야.
황가(皇家)에 불어닥친 태풍같은 비극의 연속 속에 순치제와 동악비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났어. 아담 샬,즉 탕약망이 “성욕이 매우 발달했다.”고 평했던 만주족 황제 순치제는 동악비 앞에서 중국 역대 황제 가운데 최고의 순정파가 돼서 불길같은 사랑을 쏟아부었고 그 불길에 휩싸여 죽고 만다. 이야기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순치제가 죽음을 빙자하고 출가해서 오대산 청량사의 주지스님으로 평생을 보냈다고도 해. 순치제 뒤를 이은 강희제가 세 번씩이나 오대산을 찾아왔지만 주지 스님은 황제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쑥덕거림도 있고 말이야.
어느 쪽이든 우리는 제위보다도 무겁고 황제가 누리는 특권보다도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게야. 많은 시간, 많은 이들에 의해 그 따위 유치한 감정! 으로 치부되기 일쑤인 감정이지만 그 누구도 그 감정을 자신있게 정복한 사람은 없지. 하지만 사랑은 사람을 정복함으로써 사람을 위대하게 만든다. 받침 하나 차이의 단어, ‘사랑’과 ‘사람’은 그래서 서로를 헛갈리게 하고 역사의 실을 자아 가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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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두 박멸의 날, 좀 엉뚱하게 천연두로 갈라진 연인들의 이야기를 옮겨와 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