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4월 5일 중원 고구려비 발견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 즉 한강 유역과 오늘날의 충북, 강원도 일대까지 호령한 역사는 꽤 길다. 장수왕이 위례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참수한 이래 백제는 개국 이래 터전이던 한강 유역을 잃고 피난 수도 같은 웅진으로 물러섰고 신라는 진흥왕 때까지는 소백산맥을 넘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고구려가 남한 지역에 남긴 유적은 거의 없다. 워커힐 뒷산의 고구려 군의 보루나 연천에 남아 있는 고구려성 정도? 그런데 1979년 4월 5일 무려 1500년 전 고구려의 위세를 짐작케하는 유적이 발견됐다. 중원 고구려비.
중원(中原)은 중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충청북도에도 있다. 이 이름은 신라 시대 충주 일대를 중원경으로 불렀던 것의 흔적이다. 통일신라시대 그 지역은 국토의 중심이었으니까. 충주 중앙탑은 신라 국토의 동서남북단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그 지점에서 만났다고 하는 전설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충청북도 중원에서 고구려인들이 세운 석비가 발견된 것이다. (이하 글은 조유전의 <문화재 다시 보기>를 거의 베낀 것임을 밝혀 둠 )
그를 발견한 건 전문 조사단이 아니었고 향토 역사에 관심이 많은 동호회원들이었다. 충주지청 유창종 검사, 고등학교 교사 김준식, 중원군 문화공보실장 5인의 멤버들이 구성한 동호회’ 회원들은 주말이면 폐사지 같은 곳에 가서 답사를 하고 기와도 수집하는 매우 독특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다가 문화공보실장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마을 앞에 돌 하나가 서 있다고 해서 입석리입니다. 백비(-글자 없는 비) 같긴 한데 한 번 그 돌 구경 가실래요들?”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회원들은 중원군 가곡면 용전리 입석마을로 향한다. 이 문화공보실장 김예식은 군수 치적 홍보와 언론사 상대하는 본연의 임무에 더하여 자신의 할 바 하나를 마음 속으로 꼽고 있었다. 1977년 충주를 방문한 동국대 황수영 박사의 말이었다.
“충주에서 진흥왕순수비류가 발견되어야 하는데 만약 고비(古碑)가 발견하면 꼭 연락해 달라.”
북한산부터 함경도 마운령 황초령까지 순수비를 세웠던 진흥왕인데 개국 이래 처음으로 소백산맥 넘어 한강 상류에 이른 그 감회를 어찌 남기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 진흥왕 순수비를 고대하는 이들의 근거였다.
북한산 순수비. 진흥왕은 이런 비를 곳곳에 남겼다.
입석리에 이른 예성동호회 회원들은 비를 살펴보다가 눈을 의심한다. 어렴풋하게나마 글씨가 새겨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國, 守, 土 이렇게 읽어내려다가 뜻밖의 글자에 막힌다. 안성(安城) 웬 충청북도에 안성 지명이 나오나? 그러나 그건 동호회원들의 오해였다.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것은 고모루성(古牟婁城 )이었다. 즉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고구려의 성이었다.
동호회원들은 그것이 조선의 비인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비가 마을 앞에 서 있던 것 자체가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조선 시대 이 비를 경계로 토지를 나누기도 했다고 하는 전설이 서릴 정도였고 동네 사람들에게 그 입석은 그 앞에서 아들 낳게 해 달라고 비는 장소였고, 대홍수 때는 그 밑둥째 큰 물에 뽑혀 버려 다시 세워지기도 했던, 그야말로 동네의 터주대감같은 입석이었던 것이다.
이 비석이 혹시 진흥왕 순수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풀지 않던 김예식 공보실장은 마침 일본학자들과 함께 인근 지역을 방문한 황수영 박사에게 이 비를 보인다. 황수영 박사 역시 흥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단 황수영 박사는 일본 학자들을 수발하고 단국대학교 정영호 교수와 동호회원들이 탁본을 떠 왔는데 이 탁본은 그날 오후 충주의 한 다방의 병풍 안에 나붙는다. 찬찬히 탁본을 들여다보던 일행은 거의 기절할 것 같은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 등의 글자들이 해독되는 가운데 00대왕(大王)이 툭 튀어나온 것이다. 진흥대왕이다!! 꿈에 그리던 진흥왕 순수비가 마침내 등장한 것인가 하는 흥분이 다방을 폭발시킬 듯 고조됐다. 황수영 박사는 제자인 단국대학교 정영호 교수에게 말했다. “충청북도는 정 선생네가 계속 조사해 왔으니까 정 선생이 계속 조사하시오.” 이것이 1979년 4월 5일이었다.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다시 정밀한 조사가 실시됐고 며칠 후 서울에서 급거 내려온 한 학자는 탁본을 보자마자 00이 ‘진흥’이 아닌 ‘고려’임을 읽어냈다. 또 대사자니 사자니 하는 고구려 관직들이 계속 출몰했다. “고구려비다!”
고구려비였다. 광개토왕비처럼 사면에 글씨가 새겨진 사면비였으나 두 면의 글씨는 거의 없어졌다. 동네에서 빨래판으로 써서 그렇다는 풍설이 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빨래판으로 사용된 것은 청주에서 발견된 청주 운천동 사적비라고 한다. 이 비는 신문왕 때 “삼한을 통일하고 위업을 떨쳤다.”고 위세등등하게 세운 비인데 빨래 방망이 흔적이 역력한 채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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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고구려비는 그 정체를 드러내지 못한 채 1500년을 버티고 평버만 입석으로 서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물론 대장간 기둥으로 사용돼 그 쇠들을 가느라 글자들이 마모됐다는 얘기도 있지만)
충북일보 사진
이 비가 세워질 무렵은 삼국의 각축이 그야말로 한창일 때였다. 고구려 동천왕 때 처음 고구려와 교분을 튼 신라는 이후 고구려가 강성해지면서 속국 신세로 전락한다. 광개토왕이 5만 대군을 경주까지 파견하여 왜군을 무찌른 이래 고구려는 신라를 제대로 된 나라 취급을 하지 않았다. 이 고구려비에서 신라는 그저 동이(東夷)일 뿐이었다. 신라도 그 지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오늘날의 삼척 지역에서 고구려 장수를 기습해 죽이는 것, 박제상이 눌지왕의 동생 복호를 고구려에서 탈출시킨 것, 백제와 동맹을 맺은 것, 그리고 일본서기에 기록된 바, “수탉들을 죽여라!” (고구려의 상징 삼족오를 말하는 듯)고 신라내 주둔하던 고구려군을 전멸시던 시기, 고구려의 정점과 쇠퇴를 잇는 시기에 세워진 것이 이 중원 고구려비였다.
이 고구려비는 고구려가 남한에 남긴 거의 유일무이한 문자적 기록으로 가치가 높으며 고구려의 깃발이 한반도 중부에 미쳤던 시대의 증거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비에서 고구려보다 신라에 관심이 더 간다. 지정학적으로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요동을 틀어쥔 고구려나 요서와 산동에 진출했던 백제와는 달리 선진문물을 수입하는 데에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었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려면 고구려에 빌붙어야 했다. 그러면서 가야와 싸워야 했고 백제와 밀접한 관계였던 왜와는 사생결단을 여러 번 내야 했다.
이 고구려비에 나타난 신라는 동쪽 오랑캐였에 불과했고 고구려의 위세에 형제의 의를 다짐하는 약소국이었다. 하지만 그 난관을 딛고 일어섰고 고구려비가 서 있던 중원 지역을 장악하고 결국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룬다.
고구려 역시 위대했다. 우리 역사에서 중국과 대등한 천하관을 가진 나라로서 사방을 오랑캐로 칭하며 그 천하관에 반하는 세력을 징벌하고 중국의 분열을 틈타 동북아 최강국으로 군림했다. 우리는 그 강역의 넓음이 아니라 , 그 강성함의 긍지가 아니라 그들이 흥한 이유와 망한 이유를 배워야 한다. 하지만 나는 웬지 그 시대의 신라에서 더 배울 점이 많음을 느낀다. 고구려비에서 신라를 읽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