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오책
<굿바이 편집장>을 읽고
.
언론사 시험을 보고 다니던 무렵, 필기는 통과해도 면접에서는 계속 떨어지더니 (면접관들의 내 외모에 대한 질투가 주요한 이유였던 것으로 추정) 띄엄띄엄 면접도 붙는 곳이 나오기 시작했다. 딱 26년 전 이맘 때, 신문사 하나와 방송사 자회사 하나에 최종 면접까지 통과했다. 두 회사 다 연수 출발 날짜가 1월 3일이었다. 즉 한 군데는 무조건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한 열흘 동안 나는 얼치기 햄릿이 됐다. “신문이냐 방송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
주위에 의견을 물어 보면 무슨 중국집도 아니고 짜장면 반 짬뽕 반, 신문 반 방송 반이었다. 심지어 부모님도 갈라졌고 여동생과 지금의 아내가 된 여자친구도 의견이 달랐다. 결국 내 결정이었다.
.
여기서 내가 택한 길은 매우 과학적이지만 단순한 방법이었다. 바로 동전 던지기. 500원짜리 동전을 던져 학이 나오면 신문사로 가고 숫자가 나오면 방송사로 가리라. 아싸 휙...... 땡그르르르르 결과는 숫자였다. 나는 당시로서는 여의도에 들어가는 가장 빠른 전철역이던 대방역으로 향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것은 신의 뜻이다.
.
연후 그 ‘신’께 감사하였는지 전광훈 모냥 ‘까불면 죽는다’고 부르짖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그저 방송을 업으로 살았고 기자들이란 명함을 나누거나 기사 보고 터져나오는 분통 아니면 박수의 대상일 뿐이었으며 기자들의 일이란 취재하기와 글 쓰기가 다인 줄로 오랫 동안 생각했다.
.
수백 일 밤샘해 가며 스토리를 만들고 되는 그림 갖다 붙이는 ‘편집’을 해 왔으면서도 신문이나 잡지의 ‘편집부’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업종의 일인 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더라. 오히려 입만 열면 ‘참신한 거’ ‘새로운 거’ ‘독특한 거’를 입에 달고 사는 방송쟁이들이 무색할 만큼 혁신적 콘텐츠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더라.
.
이 사실을 아주 처절하게 알려주는 책이 고경태 기자 (에디터? 편집장? 뭐라고 불러야 할지)의 책 <굿바이 편집장> (고경태 저, 한겨레출판사)이다. 대개 기자들이 지은 책들은 다양하지만 단순하다. 자신의 취재 분야에서 경험한 내용들이다 보니 그 분야들만큼 다양하지만 내용은 얼마나 열심히, 폭넓게, 또는 운좋게 단독을 따내고 엄청난 사실을 밝혀 냈는지의 무용담들이기 때문에 단순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경태 편집장의 책은 많이 다르다. 이 책은 팩트만큼이나 중요한 스토리를 얘기하고 있고 취재에 앞선 기획의 승리호를 부르짖으며 신문 기자의 근엄함은 공양미 두어 석에 팔아넘긴 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분방 예측불허의 콘텐츠 메이커의 흥미로운 경험담을 잔뜩 잔뜩 싸 짊어지고 있다.
.
기실 내가 신문을 보면서 “이거 신선하다.”고 입맛을 다신 기억은 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0000 100배 즐기기’는 중앙일보의 기획이었다. 서울 100배 즐기기, 서울 주변 드라이브 코스 100배 즐기기 등 갖가지 이름으로 나왔던 100배 즐기기의 기획은 결혼 전 아내에게 “뭔가 가볼 데를 많이 아는 남자”로 등극시켰던 그 기획은 좋은 기획, 고마운 기획이었다.
.
또 경향신문의 전설 ‘매거진X’는 아이템 기근에 허덕이던 데일리 정보 프로그램 PD에게는 오아시스와도 같은 존재였다 아이템 없다 싶으면 매거진 X를 뒤졌고 거기서 기자들이 발로 뛰어 찾아냈다고 밖에 표현이 안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거두고 챙기고 받아먹었다. ‘아이템 없는 PD들이 머리 싸맬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주었던’ 셈이다.
.
서울 100배 즐기기 기획이나 매거진 X는 유용하고 재미있었지만 ‘부록’이나 ‘특별판’ 느낌이었다. 즉 매거진 X 아이템이 언감생심 신문의 대문짝이라 할 1면 톱 기사에 올라갈 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신문이니까. 보도가 생명이니까. 신문은 보도를 통해 의제설정을 해야 하니까. 팩트는 신(神)이고 세상이 이렇게 독하게 돌아가는데 신문 1면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휴먼 스토리가 나오거나 에버랜드의 동물 이야기가 나오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걸 가능하게 만든 사람이 고경태다. 한겨레신문 토요판을 통해서.
.
2012년 대선의 해 1월 28일에 한겨레신문 토요판이 세상에 나왔다. 1면에 배치된 것은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씨의 인터뷰 기사였다. 여러 가지 ‘스트레이트’ 기사들을 제치고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롱훅같은 선택이었다.
.
“토요판 DNA의 핵심은 ‘스토리페이퍼’였다. 단발성 뉴스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스토리, 섹션의 차원을 넘어 하루치 신문 전체를 관통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찾아내고 퍼뜨리는 고정 플랫폼. 이는 신문의 호흡을 바꾼다는 뜻이었다.” 앗 스토리는 원래 PD 것인데 반칙이다. 물론 기자들이 ‘PD 저널리즘이니 뭐니 팩트를 먼저 가져간 건 지들이면서.’라고 웃을 수도 있겠지만.
.
어느 분야에서든 정통이라고 주장하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사람들은 변칙을 못마땅해한다. 변칙을 싫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데 그러다보며 변화를 놓치게 마련이다. 이건 나쁜 게 아니다. 또 변칙과 변화가 마냥 좋은 것도 아니다. ‘해온 것들’은 대개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성 있기에 선택된 시스템의 산물이니까.
.
그러나 결국 세상은 사람보다 빨리 변하고 어떤 사람은 그 변화의 끄트머리라도 잡지만 어떤 이는 술 취해 2호선 지하철에 올라탄 사람처럼 내려야 할 목적지를 잃고 쳇바퀴만 뱅뱅 돌게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깨워서 환승역에 내려야 하는 것이다.
토요판에서 고경태 기자가 가장 인상 깊은 성공 사례로 드는 것이 바로 서울 동물원에서 돌고래 쇼를 하던 돌고래 제돌이 기사다. 2012년 3월 3일 제돌이는 한겨레신문 토요판 1면 톱을 차지했다. 사람 아닌 ‘단 한 번도 언론에 등장하지 은 듣보잡’ 동물이 신문 1면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신문사 내부에서 난리가 났으리라는 건 미루어 짐작이 간다. “이명박 정권의 민간인 불법 사찰이 중요한가 돌고래를 풀어주라는 재판이 중요한가.” 이 당연하고도 지당하지만 지루하고 범연하기도 한 질문을 고경태 에디터는 꽤 강력한 포스로 ‘생깐다.’
,
이 생깜의 근거는 세 가지였다. 얼핏 들으면 애걔 소리가 나올 만큼 평범하지만 곱씹다 보면 무릎을 칠 만큼의 현명함이 깃들어 있다. 첫째 ‘참신하고 재미있다’. 맞다 민간인 사찰 뉴스 볼래 돌고래 쇼에 나오는 돌고래 볼래. 독자건 시청자건 대개 후자다. 여기서 누가 엄숙하게 언론의 아젠다 설정 기능을 얘기하며 불편해 할 때 고경태는 이렇게 씹어 버린다.
.
“익숙함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변화는 어색함에서 출발하는 법이다.” 그리고 묻는다. “돌고래 재판 얼마나 새롭고 신기한가?” 그러게 말이야. 좀 어색하긴 하지만 재밌잖아.
.
돌고래 뉴스가 불법 사찰을 날린 두 번째 근거 ‘차별성이 있다.’ 이건 한 마디로 정리된다 “한겨레만 쓰는 기사였다.” 더 이상 말이 필요한지? 이어 세 번째 근거가 사실 중요하다. “깊이를 갖췄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를 넘어 문명의 흐름을 보여 주는 기사였다.” 즉 돌고래 쇼 정보나 돌고래와 조련사와의 알콩달콩 에피소드 같은 기사가 아니라 과연 우리 인간이 바다에서 유영하는 돌고래 새끼를 포획해 와서 먹이로 길들이고 반복훈련을 시켜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이 과연 인간에게 정녕 즐거울 수 있는 일인가의 문제 제기가 있는 기사였다는 뜻이다.
.
모든 변화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변화의 결과는 천차만별이고 천양지차다. 사람 골병들게 만드는 새로움도 있고 똥맛 카레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카레맛 똥의 결과와 마주하기도 한다.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변화의 깊이와 의미가 아닐까.
.
익숙한 것으로부터 결별해야, 즉 어색해져야 새로움을 구할 수 있겠으나 그 어색함의 의미를 설명하지 못하고 읽어내지 못한다면 그 어색함은 머지않아 뻘쭘함으로 변하고 망신살로 전화되기 십상인 것이다. 적어도 모든 콘텐츠를 기획하고 새롭게 하려는 자들은 고경태의 세 질문을 명심할진저. “재미있냐? 차별성이 있냐? (전혀 다른 방향에서의) 깊이가 있느냐?”
.
이외에도 이 책 안엔 아이디어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만 비틀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힌트들이 많다. 이를테면 이런 거. 고경태 기자의 아이디어 짜내기의 세 가지 비장의 소스는 이것들이다. 첫째 옛날 신문 보기, 둘째 전문잡지 보기, 셋째 쓸데없는 생각해 보기.
.
이는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다. 방송이라면? 옛날 기획안 뒤져 보기, 1990년대 방송 보기. 둘째 전문잡지 보기. 이건 마찬가지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고 디테일은 보통 좁은 영역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갖게 되니까. 셋째. 쓸데없는 생각하기. PD들한테 사무실 지키라고 닦달하는 건 멍청한 일이다. 예전에도 좋은 부장, 본부장들은 사무실에서 노닥거리는 PD들 보이면 영화라도 보고 오라고 엉덩이를 차 버렸었다. 그러다보면 웃기는 생각도 하게 되고 웃기는 생각이 기발한 아이디어로 둔갑하는 일이 그리 귀하지 않은 것이다.
.
고경태의 동료들에게 ‘기획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나왔다고 한다. ‘기획이란 별자리다.’ 아이디어는 별 하나 하나일 뿐이다. 이 사이에 선을 그어 모양을 만드는, 즉 아이디어와 아이템을 수집하고 통합시켜 새로운 의미의 ‘별자리’를 만들고 그 별자리에 스토리까지 부여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
고경태의 동료의 말이지만 이를 읽으면서 나는 이렇게 기획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이런 기획을 통해서 고경태는 ‘쾌도난담’을 만들어냈고 돌고래 제민이를 바다로 돌려 보냈으며 만화 ‘인천상륙작전’을 상륙시켰고 한홍구 교수의 글로 듣기 쉽고 알기 쉬운 역사 마당을 열어 주었다. ‘놈현 관장사’로 평생 먹을 욕을 다 먹기도 했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도 보여 주었다.
.
이렇게 책을 읽다 보면 처음에는 “나도 기획을 잘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불태우던 것이 점차 사그라들고 기분도 시무룩해지는 부작용이 생긴다. 고경태가 이뤄낸 기획들을 읽어내리면 역시 ‘기획은 아무나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 당신 머리 좋고 촉 좋고 배짱도 있소 하며 ‘나는 아마 안될 거야’를 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이디어를 어떻게 내느냐고? 다 필요없다 절박하면 된다.”고 짐짓 너스레를 부리는 것조차 미워지는 것이다.
.
더하여 필자 고경태에 약간 서운한 점이 있다. 이 두꺼운 책 속에 한겨레 토요판에 d1년간이나 연재했던 ‘응답하라 1990’ 연재에 대해서는 그닥 코멘트해 주지 않은 것이다. 뭐 대충 그렇고 그런 콘텐츠였다는 뜻이겠지만 주관적이긴 해도 90년대라는 격변의 시기를 꽤 밀도 있게 돌아보았다고 나름 자부하고 있었는데 .....ㅠㅠ 편집자의 눈이 아무리 냉정한 것이라지만. (누가 좀 전해 주.... ㅠㅠ 내가 또 직접은 말 못해. #얘기다해놓고음)
.
이 지점에서 서운한 감정은 ‘점’이다. 이 감정을 선으로 연결해서 도대체 이 스마트한 편집장이 왜 취급조차 안하는 콘텐츠로 남았는가에 대한 돌이킴을 시전하는 순간 점은 의미를 지닌 선들로 구성된 ‘별자리’가 된다. 아 이건 좀 부족했구나, 이걸 2020년에 돌아보면 더 재밌겠다, 한 번 90년대의 변화와 오늘의 모습을 연결지어 볼까 등등의 생각에 미치면 이는 선 위에 형상이 그려진 ‘오리온’ 별자리를 만드는 기획이 될 것이다.
.
아이디어와 아이템은 널려 있다. 밤하늘의 별들만큼. 문제는 그걸 발견하고 연결하고 스토리를 만드는 일이다. 기획이 업이어야 하는 사람으로서 노력해 보자. 뭐 어느 누가 기획이라는 업에서 자유로울까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