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생일>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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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 역사의 분수령이 됐다고 해도 무방한 국가적 재앙이었고, 도무지 말이 안되는 비극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대상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 분노들은 여러 이유로 불타 올랐고 대통령 탄핵의 이유로는 채택되지 않았을망정 누구나 전 정권의 종말이 세월호로 말미암은 분노에서 영글어 갔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영화 <생일>을 보면서 느낀 가장 큰 미덕은 이 영화는 그 ‘분노’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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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박근혜도, 유병언도, 국정원도,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도, 구조는 고사하고 구경도 제대로 못했던 해경 123정도 등장하지 않는다. 으레 스테레오 타입으로 등장할 법한 얄미운 캐릭터들, 즉 세월호 유족들에게 ‘그만하라’거나 ‘보상금 받아 어떡했냐’고 지분대는 이들조차도 하나의 ‘전형’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지분거림에도 이유를 달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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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희생자 어머니가 내지르는 통곡 소리에 공부를 방해받아 ‘두 번씩이나 대학 떨어진’ 소녀가 희생자 어머니를 원망한들 나쁘게 볼 사람이 누구겠으며 “애들이 공부할 데가 없다는데” 희생자 교실을 옮기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하는 어느 희생자의 어머니 앞에서 누가 열을 낼 수 있겠는가. 감독은 세월호 이야기를 보러 온 관객들이 지난 세월 체득한 분노로 빠져드는 것을 매우 세심하게 차단한다. 그래서 남는 슬픔이 더 진득진득하고 가슴 저 밑바닥을 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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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가족의 일원을 박탈당한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슬픔의 물에서 용케 나왔다 싶어도 뻘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희생자 가족들의 꾸밈없는 민낯과 민몸뚱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짐작하되 실제로 보지는 못했고 당연히 알고 있다고 믿되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던 모습을 영화는 담담하지만 밀도 깊게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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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하지만 훌륭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분노의 바다에 처넣어 버둥거리게 만들었던 ‘다큐멘터리’들보다 백 배는 현실적이고 만 배는 더 공감이 간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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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정적이지만 분노는 동적이다. 즉 분노는 어디로 튈 지 모른다. 슬픔이 물처럼 잔잔한 수면 아래 그 깊이를 모른다면 분노는 불처럼 어디까지 삼켜 버릴지 그 범위를 모른다. 지난 몇 년간 세월호 참사에 대한 분노들에도 그런 성격이 짙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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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를 불러온 세력들에 대한 분노는 모든 것을 압도했다. 분노는 정당했지만 정확하지 못했고 더 태울 땔감만 있으면 지속적으로 불타 올랐다. 그 결과 나타난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연기는 여직 우리 몸을 감싸고 우리 눈 앞을 흐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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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러 간 날 2만 명의 시민들이 세월호 5주년을 맞아 모였다고 들었다. 나는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명제에 열렬하게 동의한다. 잊어서는 안된다. 그날의 비참할 정도의 무능함, 최고 콘트롤 타워에게 전달조차 제대로 되지 않던 한심함, 우리부터 살고 보자고 배를 먼저 탈출한 세계 최악의 직업 의식 등등 그 외 5천만의 눈 앞에 펼쳐졌던 암담한 봄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잊어서는 안된다. 영화 속에서 보는 희생자 가족들의 피눈물을 생각해서라도 비슷한 사태의 재연을 막아야 하고, 그를 위해 할 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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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해서 나는 일단 ‘분노’에서는 벗어나고 싶다. 분노할 일이 밝혀진다면 당연히 분노해야겠으나 ‘무언가’를 밝히기 위해 분노를 앞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자면 결국 밝혀질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고, 분노는 끊임없이 태울 것만을 찾아 헤매는 길 잃은 산불이 될 공산이 크기에 그렇다. 오늘 실컷 울면서 다시금 들었던 생각이다. 분노가 힘이 될 때가 더 많겠으나 오늘 느낌으로는 슬픔이 더 힘이 될 것 같다. 위로하고 기억하며 다시 이런 일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뭉쳐지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