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2일 동성동본 결혼 금지 폐지

sanha8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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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내지 후배에게 편하게 쓰는 글투로 쓴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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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2일 야만의 종말 동성동본 결혼 금지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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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지금은 말할 수 있다고 해야 되나. 페북 친구이기도 한 학교 후배의 옛날 얘기로 얘기를 시작해 보자. 3학년 때였나, 2학년 머스마가 여학생 아무개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났어. 그런 소문이야 산더미처럼 많았을 때니 그런가 보다 했어. 잘 어울린다 싶기도 했고. 그런데 좀 슬픈 색깔의 소문이 뒤를 잇더군. 술 먹으면서 남자애가 후배더러 울먹였다는 거야. “동성동본의 아픔을 아니?” 말인즉슨 남자애가 구애를 했는데 여자애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너와 나는 동성동본이야 알지 않니.” 그랬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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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안 그러다가 아니다 싶은 일이 생기면 별안간 타고난 ‘오지라퍼’(오지랖쟁이)가 되는 나는 여자 후배를 찾았어. 녀석에게 오뎅 하나 사 먹이면서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했지. “이 녀석 사고가 영 고루하네. 아니 당장 결혼하자는 것도 아니고 사귀어보자는 건데 웬 동성동본 타령을 하고 있어?” 그러자 그 여자 후배 빤히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단다. “형 그건 그냥 애 상처받을까봐 한 소리에요. 핀잔주다시피 한 건데. 전 다른 애 좋아하는데요.” 아 갑자기 말문이 딱 막히고 얼음이 돼 버렸지 뭐야. “어 그러니.” (효과음 : 우우우 우우~~~ 모래시계 <백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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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일상 용어에 혁명이 난무하고 사회주의니 뭐니 온갖 ‘진보’적인 단어들이 범벅이 돼 쓰이던 시절에 “너랑 나랑 동성동본이라 안돼” 하는 핑계가 “상처주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행해지던 것은 일종의 역사적 코미디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아니 20세기 한국 역사가 후세에 길이 전할 블랙 코미디 베스트에는 반드시 들어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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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ixabay/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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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경주 김씨 이 네 성만 합쳐도 1천만이 훌쩍 넘는다. 그런 판에 그 모든 성씨들이 ‘일가친척’이 되고 결혼하면 ‘짐승’이라는 비난을 받는 (꼴통 유림으로부터) 세상이 20세기 내내 지속됐다면 우린 그걸 문명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외가쪽으로는 조금만 촌수가 멀면 얼마든지 결혼이 가능한데 도대체 어디서 태어나고 살았는지도 모르는 동성동본이 결혼하면 열성 유전자를 생산할 수 있는 근친혼이 됐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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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유림들 시위할 때 취재 나가 봤더니 “인간이 금수(禽獸)요?”라는 외침만 로봇처럼 되풀이하더라고. 그래서 농담으로 “금수강산 아닙니까” 그랬다가 지팡이로 맞을 뻔 했지. 그런데 그분들 말대로 동성동본이 한 일가라면 그 정도의 새끼(?)를 친 김해 김씨나 전주 이씨들이야말로 인간이 아닌 금수의 생산력이 아니겠냐 말이야. 이를테면 전주 이씨가 260만 명이라는데 세상에 왕족이 5천만 인구에 260만 왕족인 나라가 어디 있냐고. 밥 먹고 애만 낳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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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도무지 문명 시대에 걸맞지 않는 인습의 덫에 걸려 인생 최고로 행복해야 할 청춘의 세월에 시퍼런 멍들이 들어야 했지. 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피눈물을 흘리며 헤어지거나 결혼신고도 출생신고도 못한 채 아이를 사생아로 길러야 했지. 하다못해 의료보험이나 세액 공제도 안됐었어. 또 나라에서도 이걸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서 몇 년에 한 번씩 동성동본의 혼읺신고를 받아 주는 절차도 마련하곤 했지만 왜 이걸 반세기 동안 붙잡고 있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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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슬픈 운명을 맞이했다.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하게 되자 애인을 찔러 죽이고 자기도 죽은 사람, 동성동본 애인으로 고민하다가 목을 매 버린 육군 중위, 1년 동안 사귀어 온 애인이 동성동본임을 가족들이 알고 헤어지라고 강권하자 그만 목숨을 끊은 의대생, 그 가운데 1996년 12월, 우리가 민주화도 됐답시고 하고 OECD도 가입했답시고 하던 시절에 일어난 사건은 무척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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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0일은 부부의 결혼 기념일이었다고 해. 부부는 동성동본이었고 혼인 신고를 못하고 살고 있었지. 남편은 재혼이었고 아내를 무척 사랑했지만 집안에서는 동성동본 여자 못들인다고 했고 혼인신고도 못하고 그냥 살고 있었어. 그렇게 8년째 되는 결혼 기념일, 법적으로는 인정 못 받는 결혼 기념일에 부부는 기분이라도 내려고 노래방을 찾았대. 그런데 그 노래방에서 무슨 노래를 불렀던 건지, 노래방에 다녀온 남편은 극약을 들이키고 말아. 이에 기겁을 한 아내는 남편 위로 뛰어들어 인공호흡을 했고 남편의 입안에 있던 극약을 빼내긴 했지만 그만 아내도 중독되고 말았다. 둘은 끝내 다시 살아서 만나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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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헌법재판소에서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내려졌지만 완전한 동성동본 금혼 폐지는 2005년 3월 2일에야 법적으로 완성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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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아버지와 어머니 피를 각각 절반씩 물려받게 되고 손자는 할아버지피의 1/4밖에 받지 못합니다. 8대 후손은 그 조상 혈통의 1/126만 갖게 되고 20대 후손은 532만분의 1만 물려받게 됩니다. 그런데 20대 30대 후손들간의 결혼을 법으로 막을 필요가 무엇인가요. 전쟁 고아들이 고아원장의 본과 성을 따랐다가 성장해서 동성동본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할 수 없다면 이같이 불합리한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이태영 박사가 말했는데 여기에 유림 대표가 답한 게 걸작이다. “왜 전통과 법이 금하는 결혼을 구태여 하려고 하는가. 남녀가 사귀다가 동성동본이면 헤어지면 되지.”

이쯤 되면 나는 이 문제가 인습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 말도 안되는 인습 때문에 구현되지 않았다면 이건 인습의 강고함이라기보다는 ‘다수’와 ‘소수’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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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는 사실 ‘소수’의 아픔에 둔감해. “왜 굳이 그걸 그렇게 하려고 해? 사람도 많은데.” 가 그 유림의 생각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는 거지. 내 일이 아니다보니 항상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됐고, 어차피 소수의 문제다 보니 누군가 총대 메고 해결하기는 귀찮은 문제가 됐고, 애써 봐야 얻을 표보다는 잃을 표가 더 많은 문제가 됐고, 결국은 반 세기 동안 우린 야만 속에서 살아온 게 아닐까 말이야. 어쩌면 이건 남녀의 문제를 넘어서 성적 소수자나 기타 우리 사회 속 소수들의 문제로도 연결될 수 있을 것 같고 .

참 이해할 수 없는 야만의 규제 속에서 피어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는 눈물겨운 게 많다. 하지만 그 중 특히 뇌리에 남는 게 있네. 1977년 모텔에서 함께 떨어져 죽은 남녀의 짤막한 유서다. 아주 짤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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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것보다 헤어지는 것이 더 무서워 함께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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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사랑했으면 헤어지는 것이 죽는 것보다 두려웠을까. 왜 우리 나라는 2005년 3월 2일 국회에서 민법 개정안이 통과되기 전까지의 그 기나긴 시간, 그 절절한 사랑 하나 지켜주지 못하고 “왜 그렇게 안되는 걸 굳이 하겠다고 그러니” 하면서 그 등을 떠밀기만 했을까. 지금도 그렇게 비슷하게 아픈 일은 없을까.

대한민국은 사랑하기도 어려운 나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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