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제헌 이래 지켜온 헌법정신인 바, 그 권력을 결정하는 국민의 선택이 선거였으니 그 중요함과 무거움을 어디에 견줄 수 있으랴. 1948년 5월 10일 독립국가 대한민국의 성인 남녀들이 역사적인 투표권을 행사한 이래 선거는 항상 역사의 분기점이요 변곡점이요 전환점이었다. 오늘은 우리 역사의 하늘에 쟁쟁하게 틀어박힌 수많은 선거들 가운데 유난히 빛나는 별 하나를 관찰해 보기로 한다. 바로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제 12대 국회의원 총선거였다. 이른바 2.12 총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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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 체제는 흔히 87년 체제라고 불리고 이 체제의 부모라 할 만한 사은 1987년의 6월항쟁일 것이다. 6월항쟁의 결과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9차 개헌이 이뤄졌고 16년만에 대통령 선거가 부활했던 것이다. 제 6공화국, 87년 체제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이 6월항쟁을 이끌어낸 단초가 바로 1985년의 2.12 총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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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그 즈음이 어떤 시기였는가를 짚어보도록 한다. 5공화국이 성립한지도 4년이 흘렀다. 정권 초기의 강력한 통제는 이완되기 시작했고 정권 스스로도 ‘학원자율화 조치’나 정치 활동을 금지했던 정치인들을 ‘해금’(解禁)시키는 등 유화책을 취했고 김영삼, 김대중 후일의 대통령이 되는 재야인사들도 본격적인 움직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3저 호황으로 인한 경제 성장 속에 중산층 두터워졌고 그들은 정치적 민주화 욕구를 표출하고 권위주의적 정권에 불만을 터뜨렸고 ‘1중대’ ‘2중대’ 소리를 듣던 야당들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 닥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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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2월 8일 정부 여당은 1985년 2월 12일 국회의원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한다. 구정 전에 선거를 치러 ‘과열과 혼탁’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즉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법적으로 봐도 임기 만료 20일 전까지만, 즉 3월에 치러도 일정상 넉넉했고 한창 추울 때 애써 총선을 치를 이유가 없었다. 기존의 야당은 물론, 관제 야당에 대비되는 선명 야당을 표방하며 창당 작업에 여념이 없던 신한민주당은 격렬히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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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신한민주당은 “우리가 2월 총선을 치르려면 하루 평균 아홉 개의 지구당은 창당해야 하는데 창당대회를 열 건물조차 없는 실정”이라며 총선을 연기하지 않으면 보이코트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놨다. 정치 규제에서 막 풀려난 사람들로서 해금되자마자 선거를 치른다는 것은 “100미터 경주를 하는데 자기들은 80미터 지점에서 뛰겠다는 것” (정치인 송원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거 날짜는 움직이지 않았고 ‘동토(凍土)선거’는 점점 다가왔다. 그러나 동토를 녹일만한 선거 열기 역시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1984년과 85년에 걸친 겨울은 유난히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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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총선 당시에는 ‘합동연설회’ 제도가 있었다. (국회의원 합동 유세가 중단된 것은 2004년의 16대 총선부터) 요즘처럼 트럭 개조한 차를 타고 다니며 사람 모이는 곳 찾아 열변을 토하는 게 아니라 모일 모시에 모 학교 운동장에 모여 그 지역구의 선량들의 ‘합동 연설’을 들었던 것이다. 2.12 총선 합동연설회장에서는 그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말’ (言)들이 터져 나오면서 선거판을 벌겋게 달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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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단연코 금기시됐던 정권의 치부인 ‘광주사태’와 ‘5.17 쿠데타’라는 말폭탄이 유세장을 강타했고 선거 유인물에는 광주 당시의 참상이 담긴 사진이 시커멓게 처리된 채 실려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이른바 ‘광주사태’가 복면을 한 괴한들이 도시를 점거하고 대한민국 국군과 싸운 사건은 아니라는 사실이 대놓고 운위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뿐 아니라 지고지엄한 위치에 있던 대통령과 그 가족들에 대한 날선 비난이나 정권의 정통성에게까지도 사정없는 손가락질이 날아갔다. 그를 방어하자니 여당 의원들도 덩달아 흥분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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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총선은 말(言) 뿐 아니라 수많은 이름들이 등장했던 선거였다. 민청학련 사건의 사형수 이철이 서울 성북구에 출마했고 한때 한나라당 대표로서 한때를 풍미했던 강삼재도 마산에서 처녀 출마했으며 후일 DJ 정권 하에서 행자부 장관을 지냈던 김정길은 부산 중 동 영도구에서 몇 번 미역국을먹은 끝에 “이번에도 저 김정길을 영도 다리 울며 건너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외치며 선거운동을 했다. 서울 동작구에서는 대학생들이 헌병대장 출신의 허청일 후보에게 “군 출신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암모니아를 퍼붓기도 했다. 암모니아는 화학적 성분 표기일 뿐 사실은 똥물이었다는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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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총선의 하이라이트는 부산이었다. 선거구 당 두 명을 뽑던 중선거구제 하에서 부산의 선거구는 6개였는데 부산진구와 중,동, 영도구 등에서 집권 민정당은 2등에도 못들고 떨어졌고 다른 곳에서도 턱걸이 2등을 했고 북구에서만 겨우 1위를 건지는 홍역을 치렀다. (이때 1위를 한 이가 장성만, 오늘날 국민밉상이라 할 장제원 의원의 부친이다) 중선거구에서 집권당 낙선자 3명이란 충격 그 자체였다. 선거 뒤 부산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어깨를 펴고 다녔다. “부산 시민은 양반, 서울 시민은 그냥 사람” 이라며 자랑했고 선거 직후 국제그룹이 날아가자 “이건 부산에 대한 복수다.”고 하며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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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기억 하나를 덧붙이자면 동네 큰길 로터리에서 보았던 몇 명의 대학생과 아주머니들의 외침을 들 수 있겠다. YMCA 회원들로 기억되는 그분들은 거의 목이 쉬어 있었다.
“기권만은 하지 맙시다. 부정선거에 이용됩니다.”
“누구를 찍든 기권은 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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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권을 하게 되면 그 명부를 이용한 대리투표를 할 위험이 있으니 제발 투표만은 꼭 해 달라는 것이었다. 투표권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던 중딩에게도 이리 찡한 기억으로 남아 있으니 그 거리를 지나던 많은 이들 역시 그랬을 것이다. 2.12 총선의 투표율은 이승만 축출 이후 최고였다. 84.6 퍼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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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당은 전국구 61석이라는 터무니없는 배분을 받아 148석을 겨우 확보했으나 창당 얼마 안된 신민당은 지역구 50석, 전국구 포함 67석이라는 기염을 토했고 끝내 이 돌풍 앞에 4년 동안 제1야당이었던 민주한국당은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가히 민의의 폭발이라 할만한 선거였다. 1985년 2월 12일은 엄동설한 중이었지만 동토를 뚫고 분출하는 물줄기가 터진 날이었고 군홧발에 숨죽이고 있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다시 스스로의 힘과 의기를 확인했던 날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