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근대인(?) 프리드리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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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가고 싶다고 했던가?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가는 가장 가까운 길은 지브롤터 해협이지. 스페인과 모로코를 가르는 이 해협을 사이에 둔 육지와 육지 사이는 13킬로미터 밖에 안되는 곳도 있어. 수영 잘하는 사람은 헤엄쳐 건널 수도 있는 거리지. 이 지브롤터의 지명의 어원은 아랍 말이야. 자발 아트 타리크. ‘타리크의 산’이란 뜻이지. 아랍인들은 이 해협을 건너와서 스페인을 수백년 동안 지배했고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 시칠리아도 2백년 가량 차고 앉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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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을 믿는 아랍인들 뒤엔 노르만, 즉 바이킹들이 와서 시칠리아를 차지해. 그 뒤에는 유럽 각국의 왕국들의 결혼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 주인들이 분주히 바뀌다가 13세기쯤 되면 독일 계통의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지금 말하려는 프리드리히 2세는 바로 그 왕가 출신이지만 시칠리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야. 오랫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땅이었고 그의 스승들은 유태인들이 많았던 만큼 그는 유럽 대륙의 여러 왕들과는 달리 꽤 자유분방하고 관용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혹시 세계사 시간에 교황권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의 교황은 누구였나 하는 문제 기억나나? 답은 이노센트 3세지. 바로 그가 이 프리드리히 2세의 후견인이었고 그 후광에 힘입어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돼. 시칠리아 왕이자 독일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그런 직함에 걸맞게 그는 그리스어 독일어 프랑스 어 이탈리아 어 라틴어에 능통한 사람이었지. 거기에 더해 특이한 언어까지 통달했어. 아랍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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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시로서는 훨씬 앞서 있던 아랍의 과학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고 해. 유럽에 숫자 0의 개념을 도입한 게 이 황제였다고 하고 의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제국 내에서 의료 활동을 금지시킨 것도 이 사람이었지. 과학자이자 의사이자 철학자이자 6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했던 교양인. '최초의 근대인'이란 별명은 그래서 나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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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2세는 당시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라 할 알 카민과도 친밀한 교류를 맺어. 아랍어로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였다고 하니까 말이야. 알 카밀도 문맹도 적지 않았던 ‘프랑크 야만인들’ (무슬림들이 유럽인들을 보던 시각)과는 격이 다른 이 군주와 기꺼이 친구가 됐고. 알 카민은 사자왕 리처드를 좌절시켰던 아랍 세계의 영웅 살라딘의 조카였는데 그가 보낸 천체 관측 기구를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식보다도 아꼈다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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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2세기 13세기, 유럽은 십자군의 열풍에 휩싸여 있었어. 프리드리히 2세가 태어나기 100년 전에 이미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지만 아랍의 영웅 살라딘에 의해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의 손에 들어갔고 이후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를 비롯한 여러 유럽 왕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지. 십자군은 계속 구성됐고 동방으로 향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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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이상 프리드리히 2세도 십자군의 열풍에 휘말려들지 않을 수가 없었지. 하지만 아랍의 문화를 동경하던 그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어. 십자군을 이끌고 가다가 장티푸스가 돌자 그를 핑계로 냉큼 돌아서는 바람에 노발대발한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기도 하지. 야사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고 해. “인류 역사상 3대 사기꾼들은 모세 예수 무하마드다. ” 아무리 황제라도 설마 이런 얘기를 했으랴 싶지만 그는 보통 중세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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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 십자군을 이끌긴 했으나 아랍 사람들을 깊이 이해했던 그는 무력 아닌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회복하려 했어. 자기네들끼리의 집안 싸움으로 골머리를 앓던 알 카민도 마침 그 제안에 응했고 말이야. 아랍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이 특이한 두 왕은 서로 어려운 결정을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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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의 3대 성지이며 자신의 삼촌 살라딘이 평생 싸워 얻고 지킨 예루살렘을 ‘프랑크 족’에게 양도하는 것도 알 카민으로서는 힘든 결정이었고 프리드리히로서도 무슬림들을 격멸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하지 않고 이교도들과 협상하여 예루살렘을 얻는다는 자체가 곱빼기 파문을 당해도 모자랄 일이었지. 하지만 둘은 합의에 이르는 데 성공해. 예루살렘, 베들레헴은 신성로마제국에 양도되나 이슬람 성지인 바위의 돔은 이슬람의 것으로 남고,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신도들의 예배를 존중할 것을 약속하고 공격하지도 않는다는 약속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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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0년 3월 18일 그는 마침내 예루살렘 왕국의 주인이 될 것을 선언한다.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기사들의 무릎까지 차올랐다는 피바다도 없었고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치른 격렬한 공방전도 없었지. 하루 전날 입성했을 때 그는 매우 독특한 명령을 내린다. 프리드리히는 예루살렘에는 이슬람 모스크가 있고 시간이 되면 기도 드리러 모스크에 오라는 ‘아잔’이 울려 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게 들려오지 않자 무슨 일인가 묻지. 대답은 “(기독교인인) 왕께 예의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고 하자 프리드리히는 무슨 말이냐는 듯 손사래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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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들으러 여기에 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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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슬람 것으로 남기기로 한 바위 돔 사원에 기독교 성직자가 들어오자 호통을 치지. ”나가라. 여기는 그대가 올 곳이 아니다.“ 그의 보호 아래 예루살렘에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어울리는 큰 시장이 서고 그 시장은 수백년을 이어내렸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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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살던 세상은 중세 유럽. 영토와 특권을 위해 아버지와 아들도 없고 정략 결혼으로 대륙의 지도가 순식간에 바뀌기도 하는 시절이기도 했고. 프리드리히도 그 시대 사람이었기에 나이 열 세 살 소녀와 결혼해 열 넷에 아이를 낳게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아들의 눈을 빼 버리고 가두고 뻔질나게 전쟁을 벌이기도 한 왕이었지. 하지만 이교도를 죽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문을 당하고 “죽여라 하느님은 그 백성을 알아보신다.”라는 무시무시한 명령이 성직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세상에서 그가 “왜 무슬림들의 노래가 들리지 않는가. 나는 그걸 들으러 왔다.”고 역정내던 그의 모습은 빛나고도 남는다는 생각이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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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21세기에 살면서도 예수 천국 불신지옥을 부르짖고 예수 안 믿는 땅에 쓰나미가 닥쳤다고 주장하고 눈 뜨고 수십억을 해먹은 목사 가족 두고 우리목사님 음해하지 말라고 목소리 떠는 사람들이 많은 ‘중세인’들이 많은 다음에야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