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부산을 출발하여 제주도로 가는 여객선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부산연안여객터미널에서 저녁 7시에 떠난 ‘코지 아일랜드호’는 꼬박 12시간 바닷길을 지나 제주항에 도착할 것이다. 밤 10시, 배는 지금 어두운 바닷길을 지나고 있다.
그녀를 만난 건 지난 겨울이었다. 대학시절 친구 H로부터 화실 정리를 해야 하는데 일손이 부족하다는 전화가 왔다. 길을 나섰다. 친구의 작업실 정리를 돕기 위해 나 말고 또 다른 일꾼(?)이 와 있었다. H가 자신의 대학후배라고 했다. 베란다에 쌓아둔 크고 작은 판넬을 거실로 옮기고, 호치키스를 뽑고, 그림은 말아서 정리하고. 작업은 예상 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마지막 그림을 말았을 때 H가 물었다.
- 저녁 식사시간도 다 되었는데, 삼겹살에 와인 한 잔 어때?
식사 중 H의 후배는 최근 자신이 전시했던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냄새가 배어나오는 그림들. 어둡고 처참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림에 대한 인상은 뭐랄까, 밝은 파스텔풍 그림 앞에 어둡고 우울한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여자, 기질은 밝은 데 어떤 사건이 그늘을 내리고 있구나!
집으로 오면서 그녀와 나는 마을버스를 탔고 나란히 앉았다. 그림 이야기, 음악 이야기, 영화 이야기. 마을버스는 서울대입구역에서 정차했다. 정류장에서 내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 혹시 시간 되면 같이 커피 한잔할래요?
커피숍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말했다. 당신은 무척 낙천적인 성격인 것 같아요. 그녀는 놀란 눈을 하더니 곧 자신이 무척 비관적인 성격이라고 답하며 어리둥절했다. 이어 왜 자신을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보았느냐고 물었다. 정반대로 얘기를 해야 어두운 커튼의 실마리를 꺼낼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대답을 숨긴 채 빠져나온 실마리를 당겼다. 그녀는 이윽고 자신이 얼마나 비관적인 사람인지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 지난해 난소 제거 수술을 받았어요. 그 후론 죽음과 수술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친구들과 웃고 놀다가도 수술할 때의 느낌과 지금의 내 상태를 생각을 하면 금새 우울해져요. 저는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극소수에 속해요.
그녀의 나이 스물 여섯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내가 입을 열었다.
- 스무 살 무렵 저는 아이가 너무 낳고 싶었어요. 그래서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죠. 결혼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아이는 꼭 낳고 싶다고. 한 생명이 내 몸에서 자라서 내 안에서 새 생명이 나온다는 건 얼마나 신비한 일일까요? 난 할 수만 있다면 아이를 낳아보고 싶어요.
- 남자가 아이를 낳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 그래요. 아이를 낳고는 싶은데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애를 낳을 수 없었지요.....당신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10%에 속한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실은 인류 중 지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람은 10%가 아니라 55%랍니다. 즉 당신은 극소수가 아니라 과반수 이상에 속한다는 거죠.
- !!!!!!!
- 2년 전이로군요. 저는 어느 암자에서 지내고 있었지요. 어느날 부목처사가 제초기로 무성해진 잡초를 베는데 제가 일손을 돕겠다고 나섰어요. 근데 그만 풀숲에 가려진 바위에 제초날이 부딪히고 말았죠. 악! 하는 순간 발에서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쳤어요. 응급수술을 받았는데 발의 동맥, 신경, 인대, 힘줄이 다 끊어졌다고 하더군요. 수술을 끝내고 마취에서 깨니 너무나 고통스럽고 왜 이런 고통이 내게 왔는지 원망스러웠어요. 그러나 저는 오래지 않아 기분이 나아졌어요.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이 앞으로 올 환희에 대한 댓가라고 여겼으니까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베풀면 베푼 만큼 돌아온다고 하죠. 그건 진리랍니다. 다른 시간,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죠.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미래의 당신에게 올 환희에 대한 대가랍니다.
내가 수술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자신의 겪었던 경험이 떠올랐는지 그녀의 눈시울은 발갛게 눈물이 맺혔다가, 내 이야기가 마지막에 이르렀을 땐 눈망울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서서히 스며들며 사라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정말 환희가 찾아오면 좋겠어요!
- 반드시!!!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한 겹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제각각 반대편에서 도착한 열차를 타고 헤어졌다.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닫히고 열차는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섰다. 나는 지하철 안의 창문을 쳐다보았다. 어두운 터널, 그건 마치 우울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하나의 프레임 같았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 이번 역은 낙성대, 낙성대역 입니다.
어둡던 프레임은 '다음 역'에 들어서자 환해졌다. 마치 겨울 지나면 봄이 오듯,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 나는 확신했다. 오래지 않아 그녀가 다시 화사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대가 지금 지나는 길이 환한 길이라면 마음껏 기뻐하라. 지금 어둔 길을 지나고 있다면 그 어둠이 앞으로 올 환희에 대한 대가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대가 지금 겪는 고통은 환희가 되어 다른 시간, 다른 지점에서 돌아올 것이다. 다만 우리들이 정확한 시간과 지점을 알지 못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