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이사를 다니는 사람은 자주 책을 방생합니다. 그러나 방생하지 못하고 간직하게 되는 책들이 있습니다. 나는 집을 옮길 때마다 혁명가로, 시인으로, 은둔자로, 방랑자로 책을 출간한 한 사내의 책을 늘 갖고 다녔습니다. 그의 섬 여행 프로젝트에 대해 듣고 나의 첫 반응은 '이런 한발 늦었군!'
'대한민국의 푸른 테두리를 따라 흩어져 있는 모든 유인도를 여행한다’는 계획은 아무나 할 수 없지만 누구라도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였습니다, 듣는 순간 훔쳐버리고 싶었을 만큼. 시인의 계획을 훔치는 대신 나는 얼른 책으로 묶여 출간되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는 자작시에서 "견딜 수 없는 사랑은 견디지 마라"고 당부했지만 섬이란 곳이 전철 타고 차례 차례 들릴 수 있는 지하철역도 아니니 정말 ‘견디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후 자동차도 없이 오직 발품 팔아 섬과 섬, 섬과 내륙을 오가는 그로부터 1년에 두서너번 전화가 걸려오곤 했습니다. “지금 인천항인데....” “지금 서울역인데....” 그렇게 그는 바닷가 항구, 기차역, 버스터미널에서 전화를 걸곤 반갑게 친구들을 초대하곤 했습니다.
"여행 다니다가 맛나는 막걸리를 만났어. 같이 마실까 해서 갖고 올라왔지. 어디서 만날까?"
나는 시인 덕분에 서울에 앉아서 전국에서 가장 맛난 막걸리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막걸리를 마시며 이번에는 어느 섬을 여행했느냐고 묻곤 했지요. 아니, 물었다기 보다는 재촉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얼른 그가 쓴 섬 여행기가 보고 싶었으니까요.
오랜 기다림 끝에 나는 책장의 한 자리를 차지할 또 한 권의 책을 갖게 되었습니다. 강제윤의 <섬을 걷다>. 한국 섬에 관한 가장 내밀한 여행기. 책장을 넘기자 눈앞에 아름다운 섬들이 점점이 내려앉았습니다. 낯익은 이름의 섬도 있고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이름의 섬도 있었지요. 하긴 대한민국 500여개 유인도 중 육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섬 이름이 몇이나 될까요. 그래서 더욱 놀라웠습니다. 그 많고 생소한 이름의 섬들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그 지점이야말로 <섬을 걷다>의 가장 큰 매력일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섬을 여행한다’기 보다는 ‘섬에 사는 사람을 여행하는 것’ 같았습니다. 섬에서 만난 할아버지, 할머니, 소년, 소녀들과 시인이 주고받는 말을 통해 우리는 섬의 가장 내밀한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었지요. 나는 겨울밤 따뜻한 온돌방에 앉아 겨울바람 소리를 들으며 맛난 귤을 까먹듯 한 알 한 알 섬들을 까먹었습니다, 한파가 풀리기를 기다리며.
<섬을 걷다>에 담겨 있던 이작도로 가기로 했습니다. 인천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탔습니다. 시인과 길동무들이 함께 한 여행길이었습니다. 서해대교 지나 뱃길로 1시간. 영화 <섬마을 선생님>을 촬영한 로케이션 장소였던 대이작도에 닿았습니다. 시인을 앞세우고 우리 는 해안도로, 숲길, 산길을 걸었습니다. 자동차 한 대 오가지 않는 길이었지요.
자동차의 방해 없이 걸음에 몸을 맡기고 온전히 걸을 때 생각은 자유를 얻는다. 애쓰지 않아도 자연히 ‘한 생각’이 오고 ‘한 생각’이 간다. 온전한 걷기란 단지 다리 근육의 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잠들어 있는 생각을 깨우고 생각의 폭을 넓히는 정신의 운동이기도 하다. -<섬을 걷다> 중에서
대이작도의 최고봉 부아산은 해발 159m에 불과하지만 정상에 서면 승봉도, 자월도, 소야도, 덕적도, 굴업도, 백아도 등 주변 섬이 다 내려다보였습니다. 한때 해적이 많아 ‘이적도’라 불리기도 했다는 이작도는 아름다운 해변과 산과 숲을 고루 간직한 섬. 한적한 오솔길들이 해변과 숲과 산을 이어주었습니다.
부아산에서 내려가 미리 예약해둔 식당으로 갔죠. 다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우리는 해 저문 해변으로 내려갔습니다. 시인과 영화감독 김태용이 <섬을 걷다> 중 ‘이작도’와 ‘자월도’ 편을 낭독하고, 가수 박강수가 노래를 부르고, 사진가 이상엽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남한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 않는 한쪽 면도 휴전선으로 가로막혀 있으니 섬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게다가 거대한 대륙도 크기만 다를 뿐 결국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지요. 그리고 좀더 멀리 나가볼까요? 우주에서 바라보면 지구도 캄캄한 허공 가운데 떠 있는 섬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사람도, 대륙도, 지구도 모두 섬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섬’이란 것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이일훈 건축가가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섬이고, 홍길동이 선남선녀들을 데리고 떠났던 ‘율도국’도 섬이고, 허생이 글을 모르는 이들만 남기고 떠나왔다는 ‘허도’도 섬입니다. 어쩌면 인류란 우주 한가운데 둥둥 떠 있는 창백하게 푸른 섬에서 또 다른 섬을 꿈꾸며 한 생을 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술자리는 새벽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고 나는 새벽 4시에 이르러서야 방으로 들어가 잠들었습니다. 새벽바다를 봐야겠다며 길을 나서는 동무들의 발걸음 소리에 나도 잠이 깼습니다. 이른 아침 썰물의 바다로 나갔죠, 이작도의 신기루 ‘풀등’에 오르기 위해서.
밀물 때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 썰물 때가 되면 바다 가운데 모비딕처럼 솟아올라 배를 드러내는 동서 2.5킬로미터, 남북 1킬로미터의 모래평원. 민박집에서 빌려준 배를 타고 바다 건너 풀등에 발을 내리자 마치 SF 영화 속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듯했습니다. 환호성 지르며 풀등을 걷는 동무들 모습에 환하게 웃던 시인이 풀등 전체 넓이가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전체 넓이 74제곱킬로미터인데 정부는 55제곱킬로미터만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했어. 나머지는 토건업자들에 의해 언제 사라질지 몰라. 모래채취가 재개되고 바닷속에 유압호스를 넣어 모래를 빨아들이면 허가지역뿐만 아니라 인근 풀등의 모래 또한 유출될 거야.”
섬이 망가지는 것은 태풍이나 풍랑 때문이 아니다. 탐욕 때문이다. 수억 년 온갖 풍파를 견딘 섬을 인간은 하루아침에 파괴한다. 인간의 탐욕이 허리케인이나 쓰나미보다 무섭다. -<섬을 걷다> 중에서
글/사진 @roadpheromone 로드 페로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