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칭에 관한 은유.
중력의 존재는 위아래의 비대칭을 만든다.
땅과 하늘이 구별되고, 아래로 향하는 중력에 대해 땅을 지지해줄 납작한 발이 필요하다.
소화는 위에서 아래로 진행되고 위에는 입이있고, 배설물은 땅에 떨어진다.
팔과 다리는 지상을 향해 늘어져 있다.
그렇다면 좌우의 구별은 어떤가. 이 지구상에서 좌우를 구별해줄만한 힘이나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상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좌우는 랜덤이란 것을 알수있다.
대체로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는 좌우 대칭이다.
앞뒤는 어떤가. 눈은 앞을 응시하고 입도 앞에 달려 있다.
앞뒤가 다르면(비대칭이면), 일단 방향이 정해졌다 치면 그방향으로 가는데 유리하다. 도망치는데도 유리하다.
앞으로 굽혀지는 무릎과,, 앞뒤로 다르게 굽혀지는 팔, 그리고 앞으로 도출되 발이 이런 이동을 유리하게 만든다.
사냥과 도망을 위해서는 한쪽방향으로 맹렬히 달릴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눈으로 보면서 도구를 앞에두고 손을 사용해, 무언가를 할때 (식사,요리,연장질)에도 유리하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지구상에서 상하를 제외하고 전후좌우 모두 랜덤이다.
이것은 전후좌우를 구별해 줄 만한 특정한 지속적 힘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동하지 않는 식물들 나무나 꽃은 전후좌후 구별이 없다.
단지, 중력에 의해 구분되는 상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동하는 동물의 경우는 다르다.
위에서 말했듯이 맹렬한 이동을 위해서는 앞뒤의 구별이 필요하다.
그래서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물들(대체로 이동수단)도 위의 법칙을 따른다.
자동차, 비행기등 좌우로 대칭이지만, 상하, 앞뒤가 구분된다.
헵타포드들읜 좌우앞뒤의 구별이 없다. (물론, 위아래의 구별은 있다. 이것은 그들이 온곳이 발디딜곳, 또는 최소한 상하방향으로 어떠한 힘이 존재한다는 곳에서 왓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힘은 주로 예외없이 중력일 것이다.사실 중력이 있어야 별도 있으니....)
그것(좌우앞뒤 구별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선조가 지구와는 다른 방식의 진화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뜻한다.
피식,포식의 관계가 없었거나, 그런 모양이 삶을 유리하게 만드는 어떤 요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유기적 환경이 가능하기나 할까? 회의적이다.
또한 다리와 눈이 짝수가 아니라 7개라는 것은, 비록 앞뒤좌우 구별이 없지만 어찌보면 완변한 의미의 대칭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헵타포드들이 타고온 비행체는 상하대칭, 좌우비대칭(또는 앞뒤 비대칭) 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비행체 내부의 중력이 지구의 중력과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며, 실제로 내부에서는 옆방향으로 중력이 작용한다.
대칭은 우주를 구성하고 해석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어쩌면 우주는 대칭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대칭은 우주의 언어이다.(갈루아의 군론)
미래를 인식한다면 어느순간 삶은 대칭성을 띠게 된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도 다른 시점을 살고 느낄수 있다면-동시성-, 그것이 곳 대칭성을 의미한다.
시간의 선분 양끝의 그 대칭되는 동시적인 분분을 겹치게 만들어 원을 만들면, 긴 시간인 순환하는 원의 내부는 동시성 사이에 끼어 아주 짧은 찰나가 될 수 있다.
즉, 그 부분내에 원은 동시성 내에 샌드위치처럼 포개져 압축된 수렴하는 한 순간일 수도 있도, 순환하는 영원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인간의 유한한 삶에 환원되어 순환되는 그 대칭성이 개인의 삶의 고리 바깥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이것은 또 다른 질문이 될 것이다.
end is the beginning is the end.
Hannah.
처음과 끝이 같은 이야기.
-언어
언어가 사고의 방식을 결정하는가?
사실 문화와 사고가 언어에 반영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질문에는 쉽게 답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언어가 사고의 방식을 결정하는 정도는 문화와 사고가 언어에 주는 영향에 비해 크지는 않을것 같다.
사람 사는건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지만 지역, 문화등의 차이로 사고와 행동양식의 차이를 만들어 내고, 이것이 언어에도 반영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헵타포드들의 언어를 배우면서 그들의 사고체계까지 배우게 되어, 미래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설정은 약간 과하게 느껴졌다.
여러 언어과 관련된 편견과 스테레오 타입까지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프랑스 사람들의 언어는 음악같아서 싸울때에도 싸우는것 같지 않을 것 같다던지,
내가 중학교땐가, 한 선생님은 언어에 된소리가 많이 들어가는 나라 사람들은 성격이 호적적인 경향이 많다며, 일본의 예를 들어 준 적까지 있다--;;
다만, 헵타포드들의 언어는 발화와 문자가 분리되어 있고, 문자자체가 그들의 사고를 내재화시킨 시스템이라면 납득할만해진다.
언어의 형식적인 면이 사고나 문화에 영향을 주는 경우라면, 한국어의 경우 음절을 하나씩 인식하고 쓸때도 한 음절씩 모아서 쓰게된다.
이것은 서양의 알파벳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낯선 문제인데, 표기와 발음의 경우가 음악이나 문학에 인식되어질때 아주 다른 경향으로 나타나게 된다.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나타내게 되는 것인데, 애당초 작은 차이가 아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한 글자가 독립적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중국어도 낯설긴 마찬가지이다.
형식은 많은 것을 담아내는 그릇이며, 사고의 틀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중국에 가서 중국화 되었다면, 그건 그들의 언어때문인가, 아니면 그들의 문화와 주변의 사람들 때문인가?
물론 둘 다일 것이고
언어가 문화를 만들고 문화또한 언어에 반영되어 있을 것이니.. 그 언아가 문화에 또 영향을 주고,
하지만 언어가 사고방식까지 바꾸는가? 라고 묻는다면 역시 쉽지 않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언어를 배울때 그 나라의 문화와 사고방식까지 접하며 배운다는 것이다. 또 그래야 언어를 잘 배울 수가 있다.
또한 생각해 볼 것은,
글자를 그림처럼 쓰는 표의문자를 사용하는 중국인의 사고방식이 표음문자를 쓰는 우리와 똑같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면화되어온 오랜 시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지리적 역사적 경험이 그리 다른데, 언어만으로 인한 사고차이를 정량화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위의 아이디어에는 동의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하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성에 관한 은유.
이것은 대칭성(symmetry)의 또 다른 이름이다. 동시성은 서로간의 치환가능성을 의미한다.
대칭을 이루는 요소들은 그 위치를 바꿔도, 전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은 시간적 차이를 만들지만, 수많은 순간들은 동시성을 가짐으로써, 서로간에 치환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순간과 순간뿐만 아니라, 순간과 영원또한 공존한다.
beginning is the end is the beginning.
Hannah.
그래서 처음과 끝이 같은 이야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