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근무라 여전히 직장..
잠시 앉아 쉬면서 창 밖에 흩날리는 눈을 바라본다. 낮부터 내린 눈은 창문으로 보이는 맞은편 건물 주위에도 쌓였다. 창 밖 건물은 수많은 민간 투자자들의 돈으로 쌓아 올리다 그만 건설사 부도로 몇 년째 쓸쓸히 방치되어 버린 건물이다. 평소 음산한 분위기를 풍겨 보통은 창문에 블라인드를 쳐놓고 가려 둔다. 하지만 오늘 밤, 건물 주위 하얀 솜이불이 둘러쳐진 모습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울리기에, 나는 블라인드를 걷어 올렸다.
스무살 대학 1학년 겨울 어느 날. 몇 년 만에 내린 많은 눈으로 학교 캠퍼스가 하얗게 잠긴 날이었다. 밤 늦게까지 계속된 과목 시험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은 발목 높이까지 눈이 쌓여 있었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길게 깔아놓은 하얀 소복 위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학교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가던 길 중간에는 공사를 하다 중단된 폐건물이 있었다. 그 옆을 지날 때였다. 철골 뼈대가 드러난 건물은 안으로 깊은 어둠을 품고 있어, 혹 그 어둠에 빨려 들어가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순간적으로 내 마음을 덮쳤다.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다음 가로등까지 좀 더 빨리 닿기 위해.
그 때. 곰돌이 같이 하얀 패딩 차림으로 어두운 건물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고 있는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눈이 크고 얼굴이 하얀, 평소 수업 시간에 혼자 멍때리기 좋아하는 우리과 여학생이었다.
남자인 나도 무서운 기분이 드는 그 건물을, 작고 귀여운 그 소녀는 음미하듯 보며 차분히 지나치고 있었다. 나는 무서워서 달렸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그 아이에게 빠르게 다가가 어깨를 쳤다.
“야. 셤 잘 봤냐”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려 놀란 눈으로 나를 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아. 응. 그냥 봤지 모.”
“그래 뭐. 끝나면 됐지. 근데 뭘 그렇게 보냐? 저 건물, 기업에서 지어주다 만 그 건물 아냐? 양아치도 아니고.. 저게 뭐냐”
그러자 그녀는 잠시 나를 올려다 보고는 조용히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저 건물.. 5층 짓다가 층계가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바닥 전체가 무너지면서 그 아래에 있던 인부들 8명인가가 죽었대... 그 뒤 일주일 후에 현장 책임자급 2명이 자살하고.. 그 위 책임자는 실종됐고.. 그래서 저대로 두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
나는 순간 온 몸에 차가운 냉기가 전기처럼 찌릿 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겨울이 되서 건물 주위에 눈이 쌓이면.. 그 눈 위로 발자국이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있어. 처음에는 그냥 그 주위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있겠거니, 했는데.. 사실 생각해 보면 저 건물 주위에 누가 지나다닐 일이 없는 거야..”
너무나 침착하게 말하는 그녀 앞에서 잔뜩 겁먹은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억지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나는 정말로 겁에 질려 있었다.
“저거 봐! 저기~ 주위에 발자국들이 빼곡하게 쫙 둘러쳐 있잖아~”
무슨 신나는 것을 발견한 듯 그녀는 나를 툭툭 치며 손가락으로 폐건물을 가리켰다. 순간, 나는 머리 끝까지 소름이 올라 머리에 힘을 주고 빳빳이 반대편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푸하하! 야 뻥이야! 너 진짜 겁먹었구나! 어떡하니..”
그랬다. 엉뚱한 생각을 하기 좋아하는 그녀가 즉시 이야기를 만들어 낸 거였다. 순간 눈 속에라도 파묻혀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던 나는, 그녀를 향해 눈을 부릅 뜨고 말했다.
“너..그거 누구에게 들었어.. 내가 그 죽은 건설사 책임..”
“야 됐어. 귀엽다. 꼴에 쪽팔리니까.. 쿠훗”
그녀는 뒤늦은 내 장난을 가볍게 무시하며 내 머리를 톡톡 쳤다.
그 날 버스 정류장엔 버스가 일찍 끊겨 있었다. 그녀와 나는 정문까지 긴 거리를 걸어야 했다. 같은 과 같은 반이면서도 별다른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우리는 길을 걸으며 이런 저런 긴 대화의 물꼬를 텄다. 삘 받은 김에 정문 앞 맥주집에서 함께 통닭을 뜯으며 잡담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손은 차갑지만 포근한 밤이었다.
오늘 밤 퇴근 후 창문 너머 폐건물 앞으로 돌아왔다. 건물 주위 길에 쌓인 눈 위로 촘촘히 발자욱을 남기며 걸었다.
나와 그녀 모두 그 겨울 밤의 두 달 후, 그 학교를 떠났다. 그 해에 나와 그녀는 모두 대학을 다니며 반수를 했고, 결과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우리 둘은 모두 원하는 곳으로 갔고.. 연락은 끊겼다.
정말 너무 오래된 일이다. 딱히 아련한 첫사랑이라거나 그런 느낌의 아이도 아니었다. 우연히 직장 앞 폐건물 주위에 눈이 쌓였고, 그 때문에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 뿐.
다만 살면서 말이 참 잘 통했다고 느꼈던 몇 안 되는 아이였기 때문에 이렇게 우연히라도 생각의 표면에 떠올랐던 것이리라. 맥주를 마시며 서로 원하는 길을 가자고 취해 몇 번을 함께 소리쳤던 그 아이와 나.
나는 다행히 내가 원했던 길을 아주 잘 가고 있다. 그녀도 그러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