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장에 있는 분말 형태의 스틱이 우연히 눈에 띄었다. 스타벅스에서 나온 가루 형태의 녹차라떼 스틱이었는데, 한동안 즐겨 마시다가 너무 자주마시다보니 질려버려서 이제 스스로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던 것 같다. 오랜만에 우유를 넣고 휘저으면서 마셔보니, 약간의 가루 뭉침은 있었지만 맛과 향은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밀봉은 언제나 중요한 것이다. 특성을 오롯이 보존하게 해주니 말이다.
모든 식품에는 유통기한과 유효기한이 있다. 얼핏 보기에 비슷하게 느껴지는 두 개념은 사실 꽤 다른 편이다. 어떠한 식품이 유통 과정을 거칠 수 있는 기한에 대한 정보를 유통기한이 담고 있다면, 어떠한 식품의 고유 특성 그러니까 괜찮다고 생각될 정도의 기한은 유효기한이 나타내는 것이다. 통조림의 경우에는 특히 유통기한과 유효기한의 차이가 뚜렷한 편이다. 예를 들어 유통기한은 2025년까지라고 하더라도, 유효기한은 개봉 후 3일 정도가 최대로 잡을 수 있는 기한이다. 그렇다면 일기는 어떨까.
일기는 일상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은 생각보다 균일하게 분절적이지는 않아서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 느껴지고 어떤 날은 너무나 많은 것을 이루어 정신없이 빡빡하게 들어차 있을 것이라 본다. 그러니 무조건 하루치를 끊어서 기록하는 것보다 우연히 그날의 사건이나 상념의 흐름을 집중해서 서술하는 편을 선호한다. 의외로 하루하루는 상당히 긴 편이어서 꼭 극적인 경험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반복되는 일상의 변주를 통해 조금씩 걷고 있는 감각과 걸으면서 마주하는 세계를 기술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삶의 경험과 일상은 시선을 통해 잘 조리되어 기록된다. 기록은 결국 저장을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여기, 블록체인에 저장되는 일기라는 것은 결국 일상의 기록이 잘 밀봉된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일기는 남겨질 것이며 수정되거나 삭제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무수한 일기를 읽으면서 잘 밀봉된 유리병이 차근차근 저장되는 풍경을 떠올린다. 이 유리병은 언제든 열어서 음미할 수 있고 즐긴 뒤에는 다시 잘 밀봉해서 놓아둘 수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맛과 향은 숙성될 것이다. 미각과 후각은 결국 얼마나 삶의 새로운 맛을 알게 되었는가에 따라 성장한다고 믿기에, 유리병을 틈틈이 열어보고 직접 느끼는 과정은 꾸준히 지속될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일기의 유통기한은 삶을 걸어가는 내내, 유효기한은 매번 열어볼 때 마주하는 삶의 순간을 뜻할지도 모른다. 누구나 유리병을 관찰할 수 있고 직접 열어서 즐길 수 있다. 각자의 삶과 세계에 따라 유효함이 어느 세계든 다양하게 닿을 수 있다는 것은 일기만이 가지는 장점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일기는 모두 소중하다. 그래서 잘 쓰인 일기와 못 쓰인 일기의 구분은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것을 즐기는 데에는 결국 즐기는 자의 취향이 관여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취향은 사람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이 지닌 삶의 궤적과 즐기는 지금의 순간마다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일기가 지금 당장 남들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하여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유통기한의 의미는 "당신이 이것을 기한 내에서 즐긴다면 좋고 심지어 조금 넘겨도 괜찮다"는 뜻이며, 유효기한의 의미는 "당신이 이것을 개봉하는 시기는 언제나 당신에게 최적의 순간이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