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철학자 Hegel 과 Deleuze를 통한 삶의 2가지 방식(否定과 肯定)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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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2가지 방식(否定과 肯定) 고찰

현대인의 삶은 바쁘게 돌아가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일상사에 시달리면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래 두분의 상반된 철학적 사고를 소개하여 우리의 삶에 대해

짧으나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 글에서는 Hegel과 Gilles Deleuze 두 철학자의 삶에 대한 태도(입장)를 실어봅니다.

Hegel은 독일의 철학자로서 인간의 삶은 부정대립과 모순으로서 문제를 극복하여 발전을 추구하고 신의 존재도 탁월하지만 무언지 모른다고 부정함으로써 그 이상 탁월하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프랑스의 철학자인 Gilles Deleuze는 사물의 차이를 병행관계 즉 상호관계가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탁월한 초월적 개념을 부인합니다.

따라서 삶은 그 자체를 즐기며 살라는 것이고 가책(呵責)과 부정과 죄의식으로 단죄(斷罪)하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1. Hegel의 철학

1-1. 부정성(否定性)

헤겔은 동물을 비웃는다. 왜냐하면 동물은 자기가 처한 현재 상태를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 없고 더 큰 놈에게 물려 죽는 방식으로만 자기 자신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내적인 부정을 통해 현재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벗어난다. 인간은 자신을 장애(障礙)로 간주하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부정(否定)함으로써 발전한다.

우리 모두는 자기 동일적인 한 인간이다. 우리의 활동은 자신에게 불만이나 혐오(嫌惡)를 가질 때 시작된다.

1-2. 대립과 모순(對立과 矛盾)

누구나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부족한 점에 대해 혐오나 불만을 표출한 적이 있을 겁니다. 우리자신과 거울 안에 대상화(對象化)된 우리의 모습사이를 매개(媒介)해 주는 것을 통해

바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한 불만, 혐오의 감정으로 표출(表出)하는 개념이 否定性 즉 對立이다. 우리는 이것을 나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논리상으로는 이 매개관계는 모순(矛盾)이다.

나와 극복해야 할 나 자신의 모순, 이것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극복(克服)하는 계기(契機)를 만들어 준다. 그래서 나의 존재는 더 나은 결과를 산출하는 생성의 운동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직장에서 오늘 무엇이 해결이 안 되었을 경우, 또는 평소 신체상의 결함 따위가 있을 경우 등 거울을 보고 느낀 여러 감정을 장애라고 생각하고 이를 부정(대립)의 방법으로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시도한다는 의미입니다.

1-3. 탁월성(卓越性)

신의 존재는 악은 물론 아니고, 덕도 지혜(智慧)도 아니며, 그 이상 탁월(卓越)한 것이지만,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즉 신의 탁월성은 베일에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탁월성이 곧 부정성(否定性)이라고 본다. 따라서 신의 존재는 부정(否定)으로만 정의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아니다)라는 부정(否定)의 술어를 제외하고 모든 술어가 신의 탁월함을 기술하기엔 모자라기 때문이다.

삶을 저 피안(彼岸)의 탁월한 것에 대해 열등(劣等)한 존재로 비하(卑下)하는 일 즉 만일 어떤 특정한 인종이 저 피안의 탁월한 능력자(영웅)와 자기인종이 가장 닮았으므로,

나머지 인종은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말한다면, 이는 인종우월주의가 탄생할 수 있는 위험천만(危險千萬)한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 때문에 600만 유태인을 대량학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습니다. 헤겔은 히틀러보다 먼저 태어나 죽은 사람입니다.

히틀러가 그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투쟁이라는 책을보면 히틀러는 독일민족은 우월하고 유대민족은 그렇지 못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2. Gilles Deleuze의 철학

2-1. 긍정성(肯定性)

Gilles Deleuze는 동물을 찬양한다. 이유는 동물은, 죽이지 않으면 살 수 없어서 서로 죽이기는 하지만, 죽음자체가 내면에 없으며 자기존재를 긍정적으로 보고 즐길 줄만 알기 때문이다.

삶 자체는 주어진 존재에 대한 긍정과 기쁨으로 차 있는데, 내면에서 자신을 부정하면서 가책의 대상으로 여기고 죄의식을 느끼는 이유는 버려야만 하는 인간의 악습 때문이다.

2-2. 차이와 비관계(差異와 非關係)

모든 사물은 차이가 있으며 사물의 발생에서 차이는 궁극적(窮極的) 단위이므로 차이의 배후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번개는 바로 빛과 어둠 사이의 차이에서 생긴다.

빛과 어둠의 차이에서 그 결과물로 하나의 정체성(正體性)을 지닌 조형물(造形物)(번개)이 출현하는 것이지, 하나의 조형물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탁월한 것(이데아)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다.

차이는 부가적인 초월적(超越的) 세계를 가지지 않는다. 차이만이 존재를 규정하는 근본개념이므로 대립의 운동의 원리로서의 헤겔의 否定性 역시 거부(拒否)된다.

差異는 마음과 신체사이의 아무런 상호영향 없는 병행관계(竝行關係)로서 비관계(非關係)를 뜻하며, 사물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

빛과 어둠이 병행적으로 있다는 사실에서 번개가 생겨나듯 차이는 본질적으로 긍정(肯定)의 대상이며 긍정 자체이다. 다시 말하면 차이는 서로 차이나는 내용들을 그 자체로 긍정(인정)하지, 극복(克服)의 대상(否定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3. 긍정과 부정의 시각

헤겔의 부정과 들뢰즈의 차이 개념은 초월적인 그리고 탁월한 존재를 인정하고 목적의식을 갖고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좌충우돌(대립)하며 삶을 살아야 하는가(전자)

아니면 차이가 있는 삶 자체를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보고 긍정적인 관점에서 즐기면서 기쁘게 사느냐(후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위의 철학자 두분의 관점에서 어느 입장에 우선 순위를 두고 살고 있는지, 살아 왔는지, 앞으로 살 것인지를 한번쯤 자문해보는 것도 바쁜 현대를 살면서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두 철학자 입장의 혼용된 삶을 지금까지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나이도 들고 직장을 그만 둔 입장이라서 그런지

앞으로는 사물을 긍정하며 나의 주변, 특히 가족의 행복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며 살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만)물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 참조→어떻게 삶을 긍정할 것인가(Gilles Deleuze, 프랑스 철학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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