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연의 '나를 드립니다' 얼마 전 난 대구 어느 사적 공간에서 김상연의 ‘수인목판화(水印木版畵)’를 보고 홀딱 반해 이곳에 짧게나마 포스팅한 적이 있다
김상연의 '나를 드립니다'
얼마 전 난 대구 어느 사적 공간에서 김상연의 ‘수인목판화(水印木版畵)’를 보고 홀딱 반해 이곳에 짧게나마 포스팅한 적이 있다. 기억하시죠? 차규선 작가는 김상연 작가와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극찬을 했다.
“저는 김상연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하면 늘 감동받고, 반성합니다. 제가 그동안 만나본 작가들 중에서 가장 열정적이면서 치열하게 자신만의 작업을 하는 작가이기 때문이죠. 선생님께서 꼭 보셨으면 합니다.”
차규선, 멋있다! 왜냐하면 나는 차규선의 작업실에서 그의 열정적이고 치열한 그만의 작품을 보았기 때문이다. 난 차 작가의 제안에 감사했다. 그런데 김상연의 작업실은 대구가 아니라 광주에 있단다.
우리는 서로의 스케줄을 조절하여 대구 ‘공공미술 투어’ 다음 날 차 작가의 자동차로 광주 김상연 작가 작업실로 향했다. 대구에서 광주로 가는 길목은 본격적인 개발이 되지 않아서인지 아름다운 풍경들로 이어졌다.
김상연의 작업실은 도심(광주)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마을(대연골)에 위치해 있었다. 김 작가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의 작업실은 축사를 개조한 것이었다. 작업실 옆 벚나무에 벚꽃들이 활짝 피었다.
난 거대한 작업실 ‘대문’에 있는 우체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대문에 세로로 구멍 낸 우체통 옆에는 연필로 쓴 주소가 적혀 있었다. 작가의 심성이 느껴졌다. 작업실 대문이 열리니 천고가 높은 거대한 작업실이 나타났다.
김상연의 작업실에는 온통 작품들로 가득했다.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작업하고 있는지를 한 눈에 알려주었다. 작업실 바닥에 내가 대구에서 보았던 추사의 '불이선란(不二禪蘭)'을 '수인목판화'로 작업한 작품이 놓여져 있었다.
목판화 둘레에는 다양한 크기의 나무들에 조각한 조각(piece)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렇다! 14개의 검은 나무 조각들이 다름아닌 ‘불이선란’을 찍은 판들이고, 15개의 빨간 나무들은 바로 ‘불이선란’에 찍은 낙관들이다.
김상연은 나에게 수인목판화 ‘불이선란’을 제작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섬세하고 정교한 작업이었다. 말이 ‘목판화’이지 사실 작품 자체로 보자면 ‘회화(수묵화)’와 다름 없었다.
내가 김상연과 열라 수인목판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광주 신세계 갤러리 윤준 큐레이터가 방문했다. 윤큐는 2015년 광주 신세계갤러리에서 김상연의 거의 모든 작품을 볼 수 있는 개인전을 두 차례에 걸쳐 기획했었다.
난 윤큐의 안목을 높이 평가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만의 작품을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윤큐가 나에게 김상연의 <육식> 시리즈부터 차근히 보라고 조언한다. 난 김상연의 <육식> 시리즈를 보자마자 반해 버렸다.
하드보드지에 검정 먹과 아크릴물감으로 그린 김상연의 <육식>(2001-2002) 시리즈는 ‘말’이 필요 없는 작품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림은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 단지 관객의 ‘눈’만 요구하는 것으로 보였다.
난 ‘검은 피’가 낭자하는 ‘식탁’이나 칠흑(漆黑) 같은 밥그릇을 보면서 ‘혁명의 순간’을 떠올렸다. 만약 사람들이 혁명의 순간 떨림과 열림에 놓인다면, 난 김상연의 <육식> 시리즈를 보면서 떨림과 열림에 있다.
김상연의 일명 ‘블랙페인팅’은 <육식> 시리즈 이외에 <존재> 시리즈가 있다. 그의 <존재>(2002-2012) 시리즈는 모티브 측면으로 보자면 (바지나 외투 등) 의상과 침대 그리고 의자 또는 검정비닐봉투(도시산수) 등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혹자는 김상연의 ‘블랙페인팅’을 보고 ‘인간의 욕망’이나 ‘인간의 채취’ 등으로 읽는다. 그런데 그의 ‘블랙페인팅’은 주체와 대상과 관계하지만 그들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의 ‘블랙페인팅’은 주체나 대상을 재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고요? 바지나 외투 등 의상을 그린 그의 그림에는 흥미롭게도 ‘몸’이 없다. 그렇다면 ‘몸 없는 옷’은 ‘인간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그의 그림은 ‘비인간적 감각’으로 나타난다고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인간적 감각’은 주체와 대상 사이의 ‘공통적 사건’을 의미한다. 만약 내가 당신과 포옹을 한다면,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우리 둘 사이의 공통적 사건일 것이다. 김상연의 그림은 바로 이 ‘공통적 사건’을 폭로한다.
김상연의 <존재-도시산수> 시리즈는 우리가 마트에서 흔히 물건을 담는 ‘검정비닐봉투’를 모티브로 그린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 꿈틀거리는 듯 보이는 검정비닐봉투의 묘사는 나에게 괴기스럽게 보여 공포감을 준다.
오잉? 그 검정비닐봉투 밑 부분에 나뭇가지들이 삐쭉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김상연 왈, “추운 겨울 북경의 어느 집에서 화분의 꽃나무를 보호하기위해 검정 비닐봉투를 싸놓은 광경을 보았습니다. 생명체를 하찮은 비닐봉지로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김상연의 그림이 화분의 꽃나무를 보호하기위해 싸놓은 검정비닐봉지를 ‘재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난 그의 그림을 ‘무언가 꿈틀거리는 듯 보이는 검정비닐봉투의 묘사’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 점에 관해 김상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물질을 상대합니다. 그림이라는 형상을 상대하고, 그것을 보고 감동받지만 그 이상의 미술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신이 포함돼 있는 미술이 그것이죠.”
검정비닐봉투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고 변형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검정비닐봉투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검정비닐봉투의 겉모습 너머에 있는 감각을 드러낸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감각은 작가(김상연)이나 관객(나)로부터 독립한 그림 그 자체이다.
2007년 난 대안공간 충정각에서 기획전 <질투는 작업의 힘>에 전시된 김상연의 ‘꽃을 드립니다’(2007)를 보았다. 그의 일명 <드립니다> 시리즈는 블랙페인팅뿐만 아니라 컬러페인팅으로도 작업되었다.
팬티만 입은 알몸의 사내는 두 팔을 벌린 손에 꽃을 혹은 물고기를 혹은 비둘기를 들고 있다. 사내는 당신에게 그것들을 드린다. 물론 김상연의 <드립니다> 시리즈에 빈손만 내민 ‘나를 드립니다’도 있다.
빈손의 사내는 나에게 말한다. “나를 드리는 일은 나를 비우거나 버리는 일이다. 내가 진정 살아있다면 나의 의식을 일깨우는 회초리를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