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있다. 도로 건너편으로 벚꽃이 만개했다. 문득 이런 문장이 떠올랐다.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저 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또 당신이 온다면 저 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누군가의 문장을 변용한 것에 불과한데 저 문장의 모체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같은 맥락의 문장이었던 것 같다. 당신이 오지 않아도 소용이 없고 당신이 온다면 그 모든 것들이 역시 다 소용없어진다는, 그런 맥락의 문장. 꽃이 피니까 꽃을 다룬 문장들이 시야 바깥으로 지나간다. 절망의 천재이면서 불행의 천재인 에밀 시오랑은 언젠가 이렇게 썼다.
“모든 언어는 나를 괴롭힌다. 꽃들이 죽음에 대하여 수다 떠는 것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편안할 것인가! (에밀 시오랑, 『독설의 팡세』중.)”
“꽃들이 죽음에 대하여 수다 떠는” 소리야 아무래도 들을 수 없는 미지의 것이지만 “모든 언어가 나를 괴롭히는” 그런 순간을 지나본 적이 있다. 뜻을 가진 모든 소리들이 나를 괴롭히고 나를 공격하고 내 주변을 에워싸고 놓아주지 않는 그런 시간을 지나본 적이 있다. 아마 당신도 그런 시간을 지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소리에게 당하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정도가 아닐까 싶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모든 신체의 기관들을 열어 두어 내 몸을 ‘소리의 전쟁터’로 만드는 방법 하나와 소리 자체를 소거해서 세계를 공간으로만 인식하는 방법 하나.
다시 테라스 건너의 벚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늦게 핀 꽃이 먼저 핀 꽃에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릴 것도 같다. 봄날 오후, 사월의 벚꽃 만개한 오후, 친구를 기다리면서 짧게 쓴다, 소리들아, 내 몸에서 잘 놀다 가렴.
내 몸에 들어와서 떠나지 못하는 그날의 소리들을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