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은 우리나라 근대를 대표하는 문인과 예술가, 사상가들의 보고다. 골목 사이사이에는 아직도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문학, 예술과 사상이 어우러지며 한 시대의 문화와 정신을 드러냈던 성북동의 대표적인 장소, 간송미술관, 수연산방, 심우장, 길상사를 찾아가보자.
북한산 줄기가 뻗어 있고, 서울의 북쪽 성곽이 부채꼴 모양으로 감싼 성북동은 옛날부터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나무와 돌이 자연스럽게 어울린 수려한 경치로 사랑받던 곳이다. 풍수지리학적으로도 명예와 벼슬이 따르는 곳이라 여겨지는 길지였으며,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1970년대부터 여러 대사관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고, 정치인의 집들도 유독 많은 동네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 후반에는 고급주택들이 세워지며 강북의 부자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인식되고도 있지만, 고급주택의 반대편으로는 1960년대 들어선 낡은 집들이 성곽 주변으로 옹기종기 들어서 있는 산동네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성북동은 골목길 사이사이에 역사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고, 근대적인 시공간을 체험할 수 있는 문화적 명소도 많다. 문학, 예술과 사상이 어우러지며, 한 시대의 문화와 정신을 드러냈던 곳이 성북동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성북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이 세워진 곳이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서화, 도자기, 불상 등의 미술품 및 다양한 분야의 자료를 수집, 보존, 연구하였고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을 설립하였는데 그의 사후인 1966년 간송미술관이 발족되었다. 간송은 1942년 훈민정음 원본을 찾아내었고, 그가 수집한 대부분의 문화재들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될 만큼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들이었다고 한다. 간송은 예술품을 통해 나라의 자존심과 품격을 찾으려 했고, 문화재 수집가의 길을 걸으며 자신의 재산을 가치 있게 사용하여 애국을 실천했던 것이다. 소박한 건물의 전시관인 간송미술관은 매년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소장품 전시회를 연다.
간송미술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얼마 전 성북구립미술관이 문을 열었고, 바로 그 옆에는 수연산방이 있다. 수연산방은 한국 근대 단편소설 양식을 완성한 작가로 평가받는 상허 이태준(1904~?)의 고택. 이태준은 1904년 철원에서 출생했는데 지식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일본이 강제로 일사조약을 체결하자 시국에 불만을 품고 개혁을 도모하다 쫒기는 몸이 되었다. 1909년 가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는데, 바로 그해 35세의 젊은 나이로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이들을 데리고 귀국길에 오른 그의 어머니 역시 3년 후인, 1912년 세상을 떠나게 되니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이태준은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랄 수밖에 없었다.
10대에 고향을 떠나 원산, 중국 등지를 방황하고, 고학을 하며 학업을 계속하던 궁핍한 시절. 청년 이태준이 1933년 정착한 곳이 바로 성북동이었다. 월북한 1946년까지 거주하며 정지용, 이상, 김유정 등과 교류하며 창작에 몰두하던 곳으로, 장단편을 집필하며 가장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했던 수연산방이야말로 이태준 문학의 산실. 부인과 2남 3녀의 가족이 함께 생활하던 수연산방에서, 이태준은 그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보내게 된다. 1946년경 월북한 후에는 북한에서의 행적이나 사망 시기가 분명하지 않으니 이태준의 삶에는 처연할 만큼 강하게 시대의 비극이 아로새겨져 있다고 할 수 있을 성싶다.
수연산방은 지금 이태준의 외종손녀가 전통 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집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사랑방의 바깥 쪽 자리는 원래 방 높이보다 한 단 정도 높게 되어 있고 유리문으로 되어 있어 소박한 마당의 경치를 감상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자리. 현재 서울시 지방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 수연산방 주변도 이태준길이라 불리며 한국문학을 풍성하게 한 작가 이태준을 기리고 있다.
수연산방 맞은편 쪽 가파른 언덕, 좁은 골목길을 한참 오르면 심우장이 나온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1879~1944)이 1933년에 지은 앞면 4칸, 옆면 2칸의 작은 기와집. 1933년만 해도 성북동은 거의 첩첩산중이었다고 한다. 만해가 성북동에 집은 지은 것도 총독부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에 숨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심우장은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 남향을 하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된다고 동북향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일제에 저항하는 치열한 생으로 일관했던 한용운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1944년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생을 마감했다.
종교인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며, 민족적 울분을 시로써 달랬던 만해의 심우장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길상사는 얼마 전 법정스님(1932~2010)이 입적을 하며 더욱 주목을 받은 곳이다.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의 주인이자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던 길상화 김영한(1916~1999)이 성북동 깊숙한 산 속 7천여 평의 대지와 건물 40여 동의 부동산을 아무 조건 없이 법정스님에게 기증하여, 조계사 사찰로 등록된 길상사. 아름다운 모습의 오래된 나무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숲을 이루듯 고즈넉한 풍경을 만들어내며 사색과 명상의 공간을 제공한다.
한국전쟁 중에 인간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 마주서지 않을 수 없었으며, 같은 겨레가 피를 흘려야 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고뇌와 방황의 시절을 보냈고 스물네 살 때 마침내 입산출가를 결심했다는 법정스님은 무소유의 정신을 널리 알리며, 수십 권의 저서를 남겼다. 법정스님은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입적하며, 사후에 책을 출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남기지 않기를 원했던 법정스님의 뜻은 불필요한 것에 집착하는 현대인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와 자세를 되돌아보게 한다.
성북동 골목길을 누비며, 곳곳에 남아있는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다보면 문화와 예술의 향기가 삶과 자연스레 어우러져 있음을 느낀다. 또 한편으로는 인간은 시대의 흐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서 고뇌하고, 저항하며, 자신의 역할을 기꺼이 감수했던 사람들. 그들의 고귀한 정신과 그들의 당당했던 발걸음에 자연스레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성북동 길 위에서 만나는 문화적 공간들, 그 속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우리 앞에 놓인 삶의 이정표를 살펴보는 것도 분명 뜻 깊은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