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커피파? vs 홍차파?"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음료가 존재하고 사람들의 취향도 제각각인 만큼
어리석은 질문이 아닐 수 없지만 굳이 저 둘 중에 고르라면 나는 커피파다.
커피의 세계가 친근하고 적극적으로 내게 맞는 맛을 찾게끔 한다면
홍차의 그것은 여전히 낯설고 다가가기 힘든 까다로움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그런 내게도 늘 웃게 만드는, 그리운 홍차의 맛이 있다.
"비가 오는군. 카파티 한 잔 어때?"
아름다운 휴온강이 흐르는 호주 타즈매니아의 작은 마을 휴온빌.
휴온빌 구석의 어느 골짜기에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체리를 재배하는 농장이 있었다.
10년 전,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갔던 나는 그 곳에 몇 개월을 머물며
농부 클리프와 함께 농사일을 거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산 너머로 해가 질 때까지 부지런히 일을 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맑고 상쾌한 공기, 아름다운 숲과 산에 둘러싸인 채로 지난 몇 개월은 단조로웠지만 전혀 지루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흙을 만지고 몸을 움직이고 나무가 싱싱하고 맛있는 과실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는 것 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치유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체리를 본격적으로 수확하는 12월 이전에는 날씨가 변덕스러워 소나기가 자주 내리곤 했다.
보통은 비를 맞으면서 일을 계속 해나갔지만 쉬이 그치지 않을 비라고 생각될 때엔
클리프가 집에 들어가서 차나 한 잔 마시면서 쉬자는 몸짓을 보였다.
"카파티"는 "cup of tea" 를 빠르게 발음했을 때 나는 소리로,
많은 호주사람(혹은 영연방 사람)들이 그렇게 표현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신발에 묻은 흙을 털고 고요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물을 끓이는 동안 그는 벽난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지폈다.
주전자에서 물이 끓었음을 알리는 하얀 김이 솟아오르면
미리 티백을 넣어둔 머그잔에 한가득 부었다.
그렇게 몇 분을 우려낸 뒤 우유도 듬뿍 넣었다.
투박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일상의 동작들.
투두둑. 지붕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
비에 젖어 더욱 짙어진 창밖 들과 숲의 초록빛.
탁탁, 벽난로 장작들이 타면서 내는 소리.
벽난로 앞에 앉아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몸이 따뜻하게 데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나와 클리프는 특별한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기분좋게 이 평화로운 온기를 공유했다.
잠시 후 큼지막한 비구름이 걷히며 비가 그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농장으로 나가 하던 일을 이어나갔다.
단조롭다고 할 수 있는 육체노동을 즐겁게 해나갈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따뜻한 밀크티를 마셨던, 짧지만 일상 속 보석과도 같았던 시간 때문일 것이다.
조천에 새로 둥지를 튼 지인을 만나러 간 날, 제주엔 큰 비가 내렸다.
그가 추천한 동네 해장국을 만족스럽게 먹은 후 찾은 곳은 근처에 위치한 원더먼트 제주로
아직 가오픈 상태의 밀크티 전문점이라고 했다.
평소였다면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했을 법한데 왠지 밀크티도 괜찮겠다, 고 생각한 건
아마도 타즈매니아를 닮은 제주, 그리고 비 때문이 아니었을까.
원더먼트 제주의 고풍스런 실내는 시골집에서 뚝딱 만든 밀크티만 즐겨 마셨던 내겐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멋스럽고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마도 홍차를 사랑하고 또 진지하게 즐길 줄 아는 이의 손길이 닿은 듯했다.
메뉴를 정한 다음 탁자 위의 종을 울리면 직원이 와서 주문을 받는 시스템이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자리를 잡자마자 종을 울렸다가 직원분이 "예!" 하는 바람에 민망한 건 안비밀...;;)
밀크티는 큼지막한 홍차전용 찻잔에 담겨서 나왔다.
'음...이건 내가 타즈매니아에서 밀크티를 즐겼던 방법과는 달라. 하지만 괜찮겠지 뭐.' 라고 생각하고
한 모금 마셨는데 세상에,
맛있었다! +_+
머그잔에 아무렇게나 마셨던 투박한 밀크티와는 달리 훨씬 섬세하고 향기 가득한 맛이었다.
날씨탓에, 그리고 소중한 이와 나누는 즐거운 시간탓에
밀크티를 마시는 내내 타즈매니아에 머물렀던 그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의 공기, 그때의 온기, 그때의 행복감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아서 절로 미소가 나왔다.
원더먼트(Wonderment)의 뜻은 "경(감)탄, 경이"라고 한다.
감탄이 나올 만한 홍차의 맛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담고서 지은 이름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게는 지나간 추억-너무나 소중하고 좋았던-을 생생히 느끼게 해준 공간으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