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다음 영화, <신과 함께>(2017) 포스터
Feelroom.3 (film)
<신과 함께> 좋은 소재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 *본 글은 작품의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과 함께>의 지옥 묘사는 탁월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사진 : 다음 영화, <신과 함께>(2017)
1. 리얼리즘을 잃어버린 한국 영화의 표본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은 모든 것이 허구다. 그러나 그 허구가 허구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세밀한 묘사와 규칙이 존재했다. 심지어 톨킨이 창조한 엘프어는 실제 사용해도 무방할 정도로 ‘체계를 갖춘 언어’다. 즉, 가상의 세계라도 진짜라고 믿을 만큼 잘 꾸며낸다면 새로운 세계가 창조된다.
<신과 함께>는 허구의 세계는 그런대로 잘 구현해냈다. 각 지옥은 처벌받아야할 죄목에 응당한 죗값을 치르게 되는데, 그 시각적 묘사는 탁월하다. 이를테면 ‘나태 지옥’에 빠진 자는 원반 위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기둥을 피하기 위해 죽도록 달리거나, ‘인면어’들의 바다에 빠져 미친듯이 헤엄쳐야한다. 이 같은 모습은 과연 게으른 자들을 위한 지옥으로는 최적(?)이다.
그런데 이처럼 시각적 묘사는 좋았으면서도 정작 이 허구의 세계에서 인물들이 사용하는 ‘규칙’은 현실의 것을 어설프게 반영한다. 기소내용을 검토한다거나, 최후 변론을 한다거나, 혹은 묵비권을 행사하느니 하는 것들은 모두 현실 영역의 일들이다. 물론 지옥이 현실의 인간들을 심판하는 곳이므로 그들을 위해 당대의 비슷한 제도를 채택하고 있을 수는 있겠지만, 영화 속에선 이미 현몽이니, 업경이니 하는 저승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귀인이나 원귀, 우리가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영역의 일들이 분명히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이 판타지적 저승세계에 사법 재판 절차가 웬 말인가?
본 적 없고, 볼 수도 없는 저승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 문구는 영화가 자신의 강점으로 소개하고 있는 슬로건이다. 그렇다. 우리는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저승 세계가 궁금하다. 그런데 왜 저승 세계의 재판은 우리의 재판 형식을 따르는가? 본 적이 있고 당장 볼 수도 있는 세계를 왜 이 판타지적 세계에서 보아야 하는가? 여기서 벌써 이 영화의 매력이 반감된다.
리얼리즘은 현실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현실의 실재성을 재현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어떤 창작물이든 이 리얼리즘의 개념은 중요하다. 허구의 세계도 우리가 그것이 실재한다고 느낄 정도의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 있을 수 없는 일도 그럴싸한 규칙이 있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 된다.
<신과 함께>의 이미지는 분명 우리가 본 적 없는 세계지만, 그 내용물은 우리가 본 적 있는 세계다. 그 익숙함이란 건 분명 우리가 고전으로부터 들어왔던 신화적 익숙함이 아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이 영화의 서사 속에서 그들만의 독창적인 룰을 창안하지 않고 현실의 룰을 복제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그 복제된 룰이 현실의 치열함을 반영하지도 않는다. 각 지옥의 주제는 공방을 벌이기 좋은 주제들이지만, 허무할 정도로 가벼이 넘어간다.
살인지옥에서 우리는 <올드 보이>(2003)의 질문처럼 ‘가벼이 행한 언행이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죄를 물을 수 있는가’ 라는 심오한 고찰에 닿지도 못한다. 나태지옥에서도 우리는 '능력이 부족해 게으를 수밖에 없었던 것에도 죄가 적용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었을 것이고, 거짓지옥에서는 '얼마만큼의 거짓이 거짓이며, 거짓은 그 자체로 악이면서도 선할 수도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었을 것이고, 불의, 배신, 폭력, 천륜 모든 지옥에서도 마찬가지로 철학적으로 고찰할만한 주제들이 풍부하게 있었다. 그렇다, 차라리 우리가 보지 못한 세상을 보여주지 못할 것이라면, 법정스릴러처럼 치열한 설전이라도 보여주었으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귀인이기 때문에 형편없는 검사가 배정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지옥의 재판은 유야무야 흘러간다. 이미 좋은 소재가 푸석해져버린 판국에 좋은 화두, 생각할 거리마저 사라진다. 여기서 또 한 번 영화의 매력이 반감된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수홍과 박중위가 얽힌 에피소드는 용납이 안 된다. *사진 : 다음 영화, <신과 함께>(2017)
이쯤만 해도 이 영화는 이미 지리멸렬해졌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현실 묘사조차도 현실을 따라가지 못해 완전히 망가진다. 인구의 절반이 진짜 군대를 다녀온 상황에서 수홍(김동욱)이 군대에서 원귀가 되는 과정은 헛웃음마저 나온다. 이 과정의 궁극은 자홍의 어머니(예수정)가 위병소를 가벼이 통과하고 때마침 훈련 중인 박중위(이준혁)에게 시위하는 장면인데, 아마 이 영화에서 서사적 판타지가 차지하는 비중을 나누자면 이 장면에도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해야할 것이다. (사실 이 장면 이전에 기무사 영관급 장교가 부대에 방문했는데 소대장이 협박에 고소로 맞대응하겠다는 장면도 어처구니없음의 절정을 찍는다. 정녕 제작진엔 군필자가 없었단 말인가?)
최소한 감독과 제작진이 그들의 하정우가 출연했던 <용서받지 못한 자>(2005)라도 봤더라면 이런 터무니없는 군대 이야기는 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하다못해 MBC의 예능 “진짜사나이”라도 봤더라면 말이다.
많이 양보해서 ‘판타지적 상상력을 동력으로 삼은 영화니까’ 현실도 어느 정도 판타지화 됐다고 하자. 그런데 이 영화가 주장하는 판타지 세계의 룰도 사실 그렇게 납득이 되는 게 아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모여들어 심판을 받는 지옥이, 억울하게 죽은 일개 대한민국 육군 병장 때문에 아수라장이 된다는 설정을 정녕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하다못해 그 죽은 병장의 원귀가 천년이 지나 마물이 되었다는 설정쯤이라도 있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신화적 상상력을 동원해 봐도, 단지 억울하게 갓 죽은 영혼이 저승 세계를 혼돈의 도가니에 빠뜨린다는 건 도저히 납득하기가 어렵다. 대한민국에 하루 사망자가 몇 명인가? 그 중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몇 명인가? 지옥의 우두머리인 염라가 나서야할 만큼 육군 병장의 사망이 그토록 억울한 일(물론 억울한 일이지만)이란 말인가?
리얼리즘의 부재, 개연성의 부족은 ‘에라 모르겠다’며 회오리가 되어 연병장을 휩쓸었던 수홍처럼 관객들의 기대를 부숴버린다. 그런데 과연 이게 이 영화만의 문제일까? 요즘은 대형 영화관에 걸리는 한국 영화를 보는 것이 두려워진다. 본 적 없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늘 본 적 있는 것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발리우드 영화를 보기도 전에 뮤지컬 댄스 신이 선연하게 그려지듯, 한국 영화 특유의 웃음과 감동 짜내기가 우리나라 영화 산업을 침체기로 이끌까 두렵기까지 하다.
차사 역할의 두 배우가 정말 고생했다. 관객인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다. *사진 : 다음 영화, <신과 함께>(2017)
2. 말하지 말고 제발 보여줘라
어떤 영화든 원작을 각색한 영화라면, 방대한 이야기를 한정된 런타임에 압축해야한다는 부담감은 있기 마련이다. 웹툰이 성행하고, 이를 각색한 영화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면서 이제 어떤 웹툰의 성공은 곧장 영화화를 염두에 두어도 좋을 지경이 되었다.
웹툰은 그 자체로 훌륭한 콘티가 된다. 때문에 웹툰을 영화화할 때, 영상의 이미지, 뉘앙스를 결정하는 상상력조차도 베껴 쓰면 된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 양이 무척 방대하므로 압축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는 없다.
각색한 영화의 성패가 여기서 갈린다. 원작을 복제하기 위해 애쓰는 작품들은 원작도 따라가기 버거워 졸작을 양산해낸다. 그러나 원작의 굵직한 개념만 가져와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영화들은 훌륭한 명작으로 재탄생하곤 한다. 각색의 대가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 <아가씨> 같은 작품들만 봐도 원작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지만 그렇다고 원작에 녹아있는 분위기나 철학이 소멸되지도 않는다. 어째서일까? 그건 박찬욱 감독은 하고 싶은 말만 하기위해 자잘한 부분은 이미지로 치환해버리는데 탁월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과 함께>는 작품의 세계관을 부여하기 위한 존재로서 원맥(주지훈)과 덕춘(김향기)을 활용하는데, 이들은 마치 말하는 기계 같다. 배우들이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영화의 연출이 배우들을 말하는 기계가 되도록 몰아놓은 것이다. 차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원귀가 왜 위험한지, 배우들의 입을 혹사시키는 방법 말고는 정녕 보여줄 방법이 없었을까? 이 영화를 연출하기 위해 5년이나 검토했다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영화가 보여주지 못하고 말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상상력의 한계에 직면했다는 뜻이다. 사과를 먹어본 적 없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사과를 먹여주는 일이다. 그도 안 된다면 탐스러운 사과의 윤기 나는 붉은 이마를 보여줄 일이다. 그러나 가장 최악의 방법은 ‘사과는 맛있다’고 설명하는 일이다. 더구나 이미지가 주(主)인 영화에서 이미지를 제쳐두고 제품설명서 읽듯 내용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해야만 한다면, 차라리 같은 부분을 언제든 되짚을 수 있는 소설을 읽는 것이 낫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앞서 지적한 두 가지를 모두 상쇄할만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가난’에 대한 묘사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라는 편지를 남긴 채 동반 자살했던 송파 세 모녀 사건처럼, 가난이란 늘 죽음을 머릿속에 두고 간신히 숨을 연명하는 파멸적인 암담함이다. 죽는 것이 살아내는 일보다도 편하게 느껴지는 일이 매일 같이 반복된다. 가난의 치명적인 부분은 현재도 고통스럽지만, 내일은 더 큰 고통이 ‘예정’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가난한 사람들은 병에 걸려도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오히려 더 크게 병을 키우게 되고, 이전 글에도 언급했듯 푼돈이라도 쥐기 위해서는 위험하고 더러운 일도 마다해선 안 된다. 가난한 와중에 병에 걸린 어머니까지 둔, 맏이 차홍의 마음은 그야말로 절망 그 자체였을 것이다. 어머니를 살해하려고 마음먹었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어머니 그 자신도 아들이 자신을 죽이려 함을 알고 있었음에도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는, 그런 처절함이야말로 가난의 본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의 끝에서 뛰쳐나와 인명구조의 업을 선택해 가난을 승화시킨 차홍은 과연 귀인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이 영화가 말미에 묘사해둔 가난은 네오리얼리즘 영화인 <자전거 도둑>(1948)이 생각날 정도로 뛰어나며, 설명보다도 더 강한 이미지의 영화적 힘을 있는 그대로 분출한다. 그러니 의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장센을 가다듬을 충분한 힘이 있음에도 왜 전반적으로 이 영화는 지리멸렬해졌는가? 그나마도 결국 서툰 휴머니즘으로 봉합함으로써 끝내 아물지 않는 상흔을 남기고야 마는가? 짙은 아쉬움이 남는다. 적어도 가난을 묘사한 부분만큼만 영화를, 그리고 사람과 저승 사이의 인과관계와 인물 간의 드라마를 끌고 갔더라면, 이 영화는 걸작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