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8세(리처드 버튼)은 튜더 왕조 시대를 연 헨리7세의 둘째 아들이다. 형인 아서 튜더가 일찍 세상을 떠난 까닭에 형의 미망인인 여왕 캐서린(이렌느 파파스)과 결혼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헨리8세는 캐서린과의 결혼 생활에 싫증을 느꼈다. 부왕 헨리7세가 스페인과의 정치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아들 헨리8세를 캐서린과 정략 결혼을 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8세는 무도회에 참석한 볼린가의 막내딸인 앤 볼린(쥬느비에브 뷰졸드)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앤 볼린은 프랑스에서 막 영국에 돌아와 약혼자인 퍼쉬(테렌스 윌톤)와 결혼을 약속한 차였다. 앤과 퍼쉬는 결혼을 위해 국왕의 허락을 요청하지만 헨리8세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고, 앤을 자신의 아내로 차지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왕의 아이를 가진 언니를 둔 앤은 헨리8세의 구혼을 거절한다. 앤이 자신의 구혼을 받아주지 않아 점점 안달이 난 헨리8세는 앤을 강제로 왕실로 불러들인다. 왕실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권력을 맛보게 된 앤은 헨리8세에게 결혼을 받아들이는 조건을 제시한다. 자신은 첩이 아닌 왕비여야 하고, 자신의 아들이 왕권을 계승해야 한다는 것. 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헨리8세는 캐서린과 이혼을 하기 위해 교황청의 허락을 요청하지만 교황청은 헨리8세와 캐서린과의 이혼을 허락할 리 없다. 화가 난 헨리8세는 자신이 수장으로 하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결혼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숙청한다. 결국 헨리8세와 앤, 두 사람은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둘의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않는다. 앤은 왕이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 엘리자베스(아만다 제인 스미시)를 낳고, 딸의 왕위 계승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헨리8세는 앤과의 이혼을 위해 앤을 신하와의 간통죄로 엮어 감옥에 잡아넣는다.
헨리8세와 앤 볼린의 결혼 사건으로 보는 16세기 영국 튜더 왕조 시대
<천일의 앤>은 헨리8세와 그의 두번째 아내였던 앤 볼린의 결혼 생활을 그린 역사물이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아니 앤이 왕비로 보냈던 시간이 천일이 채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천일의 앤’이라 불리는 유명한 사건이다. 영화는 헨리8세가 앤을 처형하기 위해 수상 크롬웰(존 콜리코스)이 가져온 문서에 서명을 하던 중 앤과 있었던 일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왕권이 약한 까닭에 교회의 눈치를 봐야했던 16세기 영국 튜더 왕조 시대가 관객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헨리8세와 앤 볼린의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전개하면서 당시 시대적 배경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예를 들면, 헨리8세가 앤 볼린과의 결혼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과정을 통해 절대 왕정으로 대변되는 튜더 왕조의 성격은 물론이고, 헨리8세의 형수이자 첫번째 아내인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이 스페인 왕실과의 정치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강제로 행해진 정략 결혼이었다는 사실을 함께 드러낸다.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앤 볼린이 헨리8세의 명령을 불복한 이유는 약혼한 남자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왕에게 농락당해 왕의 아이를 가져 홀로 살아가는 언니처럼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헨리8세와 캐서린 왕비 그리고 앤 볼린 세 사람의 상황을 통해 역사적 배경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결국 로마 교황청이 헨리8세의 이혼 신청을 거절하자 헨리8세는 로마 카톨릭과 관계를 끊고 자신이 교회의 수장으로 올린 영국 성공회를 만든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은 헨리8세를 파문한다. 그것은 영화 내내 드러나는, 강력한 왕권을 과시한 헨리8세의 기질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출발점이다.
이처럼 영화는 고집이 세고, 원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내고야마는 헨리8세의 기질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한편, 앤 볼린이 권력을 맛을 보면서 서서히 변해가는 과정도 함께 그려낸다. 처음에는 헨리8세의 구혼을 거절하던 앤은 강제로 궁에 들어가면서 권력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고, 결혼의 조건으로 자신의 자식을 왕위로 계승하게 해줄 것을 헨리8세에 요구한다. 그래서 캐서린의 딸 메리는 서자로 신분이 격하됐고, 왕위 계승 순서는 앤이 낳는 자식 다음으로 바뀌게 됐다. 하지만 앤은 아들이 아닌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헨리8세는 자신에게 아들을 선사하지 못하는 앤에게 불만을 느끼고, 수상 크롬웰과 함께 왕비를 교체할 방법을 상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앤 볼린이라는 안타까운 여성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당시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왕 중 하나였던 헨리8세의 절대 왕조의 시발점이 되는 일화가 되었다.
실제로 헨리8세는 예술을 사랑한 왕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영화에서 헨리8세의 대사로 아주 잠깐 등장하지만 그는 음악을 작곡, 작사했고, 직접 시도 지었다. 또, 사냥과 말타기 그리고 무예도 출중했던 그다. 그러나 그의 기질 역시 영화에서는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리처드 버튼과 헨리8세
헨리 8세를 연기한 배우는 리처드 버튼이다. 영국 출신으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부로 무려 7번이나 올랐던 배우였다. <내 사촌 레이첼>(1952)로 할리우드로 옮겨간 그는 <클레오파트라>(1963)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맡았고(그의 아내였던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했다), 역시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함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6)에 출연했다. 또, 역사물 <베켓>과 첩보영화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 그리고 액션물 <독수리 요새> 같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활약했다. 배우로서 훌륭한 경력을 이어간 그이지만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두 번 결혼한 것을 포함해 총 다섯 번의 결혼 생활을 한 개인사로도 꽤 유명하다. 그의 여성 편력만 놓고 보면 헨리8세와 여러모로 겹쳐진다.
김성훈
감독 찰스 재롯의 출세작인 시대극
런던 출신인 찰스 재롯은 영화사에서 익히 알려진 감독은 아니다. 영화(총14편, IMDB Pro 집계)보다 TV시리즈(39편)를 더 많이 만든 것을 보면 TV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Time to Remember'(1962)로 데뷔한 그를 세상에 알린 건 <천일의 앤>이다. <천일의 앤>이 1970년 골든 글러브 감독상에 노미네이트되면서 찰스 재롯은 할리우드에 진출해 유니버설과 함께 <비운의 여왕 메리>(1971)를 연출하게 된다. 이 영화 역시 1550년대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영국,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의 수난사를 그린 실화다. 그리고 이듬해 <비운의 여왕 메리>는 여우주연상, 미술상, 의상상, 사운드상, 음악상 등 총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이후 별다른 흥행작이나 비평적으로 좋은 평가를 내놓지 못한 것을 보면 찰스 재롯은 확실히 시대극 연출에 일가견이 있었던 감독이었다. 한창 주가를 높이다가 판타지 장르와 뮤지컬 장르를 버무린 <잃어버린 지평선>(1973)이 흥행 실패하면서 그는 TV영화로 옮겼다. 수많은 TV영화를 찍으면서 간간히 영화 작업을 했는데, 그것은 최연소 세계 일주 항해자였던 리 그레이엄의 이야기를 그린 <도브>(1974)나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첩보 장르물 <전선의 여우>(1990) 같은 영화였다.
*<천일의 앤> : https://www.themoviedb.org/movie/22522-anne-of-the-thousand-days?language=en-US
*평점 : 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