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 김제동 씨가 새 책을 냈습니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라는 다소 소극적인 제목을 달고 나온 이 책은 그가 헌법에 대해서 공부한 후 느낀 바에 대한 에세이집입니다.
아는 분도, 모르는 분도 있겠습니다만 김제동 씨는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고생을 했죠. 그런 경험이 헌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에세이집은 헌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서가 아닙니다. 김제동의 헌법 독후감이라는 부제가 있긴 하지만 사실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 미처 잊고 지나쳤던 우리의 권리와 의무, 바꿔나가야 할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는 책이죠. 이 에세이집에는 헌법에 나온 조항 하나하나에 대한 그의 생각, 헌법에 적힌 대로 세상이 바뀌길 바라는 그의 소망이 뭉쳐있는 글이 모여 있습니다. 초반에는 다소 정리가 되지 않은 모습의 글이 보이기도 하지만, 중반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그의 따뜻한 진심이 잘 전해지더랍니다.
그가 바라는 세상에 관한 글을 읽던 중 예전 생각이 나는 구절이 있어 옮깁니다.
옥스퍼드였는지 케임브리지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학생들이 제게 학교 투어를 시켜줬어요. 학교를 둘러보다가 "여기 이 초상화는 누구냐?"고 물었더니 자기네 학교 선배래요. 그런데 그 선배가 우리들이 아는 사람이에요.
아이작 뉴턴
사실 그런 건 별로 안 부러웠어요. 정말로 부러웠던 건 따로 있어요. 건물 벽돌에 뭘 하나씩 새겨놨더라고요. 가만히 보니까 동판에 새겨놓은 것도 있고 학생들이 임의로 새겨놓은 것도 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1870년부터 1905년까지 우리에게 따뜻한 밥을 해주셨던 메리 아주머니에게." 학생 식당에서 일하셨던 분을 기리는 거죠. 그리고 왕의 초상화 옆에 또다른 그림이 있어서 "이건 누구냐?" 하고 물었더니 학교에서 경비로 일하셨던 분이래요. 그분의 초상화를 학생들이 직접 그려서 걸어놓은 거예요.
저는 그 경비였던 분을 왕과 동등하게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고 우리가 살면서 도움을 주어야 할 사람들로 대하는 그 태도와 문화가 참 부러웠어요.
제가 대학생 때 지냈던 기숙사 식당 이야기를 꺼내봅니다. 학교 기숙사는 1970년대 지어졌고 100여명 정도 학생이 살던 작은 규모의 기숙사였기에 식당도 자체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주방에는 기숙사가 지어졌을 때부터, 20대 나이 때부터 일해온 아주머니들이 계셨는데 새로운 기숙사가 지어지기 직전인 2014년까지 적은 임금에도 식당일을 하셨습니다. 똑똑한 학생들의 밥을 책임지는 것이 본인들의 자부심이라고 하면서.
일년에 한번 하는 홈커밍데이 때는 식당 아주머니께서 해 준 밥을 먹었던, 이제는 나이가 드신 교수님들이 방문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주머니들은 오랜 세월의 보람을 한꺼번에 느끼는 듯 교수님들의 두 손을 맞잡고 좋아하셨더랬죠.
제가 졸업을 한 뒤에 기숙사를 부수고 새로 건축하면서 새로운 식당은 기존과 다른 방식, 위탁운영으로 바뀌게 된다는 통보를 받고 이제는 학생들에게 밥을 해줄 수 없다는 소식에 아주머니들은 식당에서 서로 손을 붙잡고 울었다는 이야기를 후배들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새로 지어진 기숙사 안에는 건축 기부금을 낸 사람의 명단이 있을 것입니다. 기부금을 낸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새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랜 기간 애정으로 헌신한 사람들의 기록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신축 기숙사에 들어가본 적 없고, 앞으로 들어가 볼 일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분들의 기록이 기숙사 어딘가에 있기를, 그리고 나중에 나이 들어 그 기록을 볼 수 있는 세상에 살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