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난 후 그의 이전 저작들을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진중한 내용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세상과 주변을 보는 관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소개할 글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그의 글을 모은 《느낌의 공동체》에 수록된 '고뇌의 힘'이라는 글입니다.
고뇌의 힘
10년을 만난 연인에게 싫증이 났지만 헤어질 명분을 찾지 못하던 그때 때마침 실용주의라는 복음이 도착했다. 많은 사람이 이념 따위는 내다 버리자고 주장하는 그 이상한 이념에 한 표를 던졌다. 그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민주주의니 인권보호니 언론자유니 하는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런 것들은 옷과 밥과 집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고 옳고 아름다운 것들을 과감히 내던지고 쉽고 유용하고 폼 나는 것들에만 헌신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대박’이 시대정신이 되고 ‘특목고’가 백년지대계가 되고 ‘뉴타운’이 주거정책이 되고 ‘토건’이 생태철학이 되는 시대를 맞이했다. 우리가 함께 꾼 백일몽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실현된 셈이다. 그러니 이명박정부는 자유와 민주의 공화국이 낳은 기형아가 아니라 자본과 속물의 제국이 낳은 우량아라고 해야 옳다. 우리는 이제 어렵고 옳고 아름다운 가치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됐다.
지난달 28일 열린 용산참사 재판 제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검찰 측의 논리를 거의 대부분 받아들여 피고인 모두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아무리 무정한 법 논리를 갖다 대도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권력과 자본의 공모 속에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태의 본질을 외면하긴 어려울 거라 믿었다. 그래서 재판부가 법 논리와 양심 사이에서 깊이 고뇌할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재판부의 비정한 판결문에는 어떠한 고뇌의 흔적도 없었다.
지난 9일(월) 한 여성이 공중파 방송에 출연해 ‘키 작은 남자는 패배자’라고 말해 공분을 사게 된 일도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 말은 홍대를 다니는 한 여성이 한 말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무의식이 한 말이다. 외모에 관한 한 ‘정치적 올바름’이 ‘위선’으로 조롱받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됐다. 문제의 여성 출연자와 제작진은 방송이 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을 것이다. 표정과 자막에는 고뇌의 흔적이 없었다.
당위와 현실이 팽팽하게 긴장할 때 고뇌가 생겨난다. 당위의 힘이 과도하게 커지면 억압이 생겨나고 현실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면 마비가 올 것이다. 그러니 자주 흔들리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일 것이고 고뇌는 건강한 사회의 증명서일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어렵고 옳고 아름다운 것들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면서 우리 사회는 점점 고뇌하는 법을 잊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잘 알려진 대로 톨스토이의 문학과 그의 삶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문호 톨스토이는 인류의 교사를 자임했지만 인간 톨스토이는 자기 자신의 가장 열등한 제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 괴리를 좁히기 위해 고뇌했고 그것이 톨스토이를 위대한 인물이 되게 했다. 고뇌는 공동체의 배수진이다. 그 진지가 무너지면 우리는 괴물이 되고 말 것이다.
- 원문: 대학신문: 고뇌의 힘
요새 저를 되돌아보면 어릴 적에는 상상도 못했던 행동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적당한 거짓말도 필요하다며 그다지 죄책감을 가지지 않으며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한다든지 인터넷 기사에 나오는 사람들에 대해서 별로 알아보지 않고 비판을 한다는지 말이죠.
곰곰히 생각해보는 습관을 잃어버렸는지도, 아니면 너무 바빠서 별 생각없이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 이후에 행동을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사려깊음. 충분히 생각해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행위 이전에는 고뇌하는 우리의 모습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느낌의 공동체
저자: 신형철
출판사: 문학동네
출간: 2011-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