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이부자리에 누워서도 휴대폰을 붙잡고 스팀잇을 하다가 새벽 늦게야 잠들었다. 한 두 시간쯤 잤을까, 얼핏 물소리가 들렸다. 보나마나 화장실 물소리겠지 싶었다.
나는 아직 고장난 변기를 고치지 않은 상태다. 당장은 돈이 없기 때문에 다음 달 인세를 받으면 고치려고 기다리고 있다. 대신 예전처럼 변기에 물을 대는 밸브를 꽉 잠그지 않고 조금 틀어두었다. 밸브를 잠그면 압력 때문에 펑 터질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밤마다 화장실 변기에서 나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자는 탓에 자꾸 잠이 깬다. 잠귀가 밝은 편도 아니고 성격이 예민한 편도 아닌데 이상하게 물소리는 신경 쓰인다.
시간을 확인하니 겨우 새벽 5시였다. 7시 반까지 두 시간 반은 더 잘 수 있는 시간이다. 나는 매일 아침 7시 30분마다 남자친구에게 모닝콜을 건다. 내 하루 일과 중 제일 중요하면서 유일하게 밥값을 하는 일이라 무조건 그 시간엔 깨어 있으려 한다.
문제는 아침잠이 많아 혼자선 절대 못 일어나던 남자친구가 요즘 들어 잘 일어난다는 거다. 내가 모닝콜을 걸기 전에 먼저 일어나선 '일어남'하고 카톡을 보낸다. 그럼 모닝콜을 걸 필요가 없어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머쓱해지는 한편, 기묘한 슬픔도 느낀다. 남자친구에게 신세만 지는 내가 유일하게 남자친구를 도울 수 있는 게 모닝콜인데, 이젠 그마저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기분에 처량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 알량한 만족감을 채우기 위해 남자친구한테 늦잠을 자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나는 다시 자려고 몸을 뒤척였다. 그러나 이미 물소리에 예민해진 상태라 나도 모르게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됐다.
또르랑 또르랑 하는 변기 물소리는 어떻게 들으면 샘물이 흐르는 소리 같았다. 어릴 적 아버지의 친구분께서 집들이 선물로 가져온 실내용 분수대 소리 같기도 했다. 또는 외할머니댁 오래된 기왓장 처마에서 방울방울 떨어져내리는 빗소리처럼도 들렸다.
그런 식으로 물소리를 마음속으로 이렇게 저렇게 비유해보다가 문득 묘한 사실을 깨달았다. 물소리가 중첩되고 있었다. 또르랑 또르랑 소리 속에 또옥 또옥 하는 다른 물소리가 섞여 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허둥지둥 베란다로 달려가면서 2년 전 있었던 물바다 사태를 떠올렸다.
2년 전, 밤새 원고를 수정해서 출판사 출근 시간에 맞춰 메일로 보내놓고 아침에 잠든 적이 있었다. 이 꼴도 보기 싫은 소설을 드디어 끝냈다는 기쁨(그 소설을 전체적으로 10번 이상 고쳤다. 아무리 재미있는 소설도 짧은 시간 동안 10번 읽으면 질리는데 하물며 내 소설은 말할 것도 없다)에 취해 자는데 갑자기 물소리가 들렸다.
그때는 변기 소리가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물소리가 대체 어디에서 나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더니 누워 있을 때는 몰랐던 물소리의 출처를 알 수 있었다. 베란다였다.
베란다 문을 열자 바닥이 온통 물바다... 까지는 아니고 4분의 1 정도가 물바다였다. 세탁기와 수도를 연결한 호스 머리에서 물이 줄줄 새고 있었다. 수도꼭지 입구를 조인 나사가 헐거워진 것이다.
나는 얼른 물을 잠그고 드라이버를 가져왔다. 어찌어찌 나사를 잘 조였는지 다행히 그 뒤로는 물이 새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탁기를 사용할 때만 수도를 틀고 평소엔 잠가두었다.
아무래도 나사가 다시 헐거워져 물이 새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긴, 2년이나 지났으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베란다로 가다 말고 드라이버를 챙겨 다시 베란다로 갔다. 그런데 베란다 문을 열기 직전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어라, 평소엔 수도를 잠가두는데 왜 물이 새지? 분명히 며칠 전에 세탁기를 쓰고 잠가뒀는데?
나의 의문대로 베란다 물소리의 범인은 수도 호스가 아니었다. 게다가 베란다 바닥은 물바다 대신 얼음바다가 되어 있었다. 세탁기 옆, 위아래 집과 연결된 길다란 배수관에 생긴 참사를 보고 나는 진짜 말 그대로 입을 쩍 벌렸다.
배수관 윗 부분, 도넛처럼 튀어나온 주위에 고드름이 촘촘하게 생겨 있었다. 마치 왕관을 뒤집어놓은 모양 같았다. 그 부분에서 물이 똑 똑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날이 워낙 추워 물방울이 떨어지는 족족 얼어 꼭 종유 동굴 바닥의 종유석 같이 얼음 기둥이 쌓이고 있었다. 한 일주일쯤 지나면 위의 고드름과 아래의 얼음 기둥이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배수관이 저 꼴이 된 이유는 간단했다. 이 추운 날 윗집 또는 윗윗집 또는 윗윗윗집에서 세탁기를 돌렸기 때문이다.
이 낡은 아파트에선 매년 겨울마다 세탁기 전쟁이 일어난다. 세탁기를 돌려 나온 물이 배수관을 타고 내려가다가 얼어붙어 어찌어찌 돼서(이 원리를 잘 모르겠다) 1층, 때로는 2,3층 집의 베란다까지 물바다를 만들곤 했다.
그래서 한낮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에는 관리사무소에서 당분간 세탁기를 사용하지 말라고 실내 방송을 한다. 요 며칠도 유난히 추웠기에 관리사무소 방송이 하루에 세 번씩 나오곤 했다. 하지만 윗집 또는 윗윗집에선 그 방송을 무시하고 기온이 무려 영하 15도를 왔다갔다하는 날씨에 과감하게 세탁기를 돌려버린 것이다.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쌓이고 있는 얼음 종유석을 보고 처음엔 황당했다가 나중엔 짜증이 났다. 가뜩이나 변기 물소리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데 이제는 베란다에서까지 물소리가 나다니, 이 무슨 산 넘어 산이란 말인가.
아니지, 변기를 아직 수리하지 않은 상태니까 산을 넘지 않은 상태에서 산을 또 만난 거다. 그야말로 산 위에 산 있는 꼴이었다.
저 얼음에 뜨거운 물이라도 부어서 녹여야 하나, 그랬다가 괜히 아랫집에 피해를 주는 게 아닌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일단 베란다를 나왔다. 이미 잠이 완전히 깨 버린 상태라 글을 쓰면서 7시 30분이 되길 기다리기로 했다.
큰방으로 돌아와 넷북을 켜고 앉았지만, 글쓰기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나는 혼자 막 씩씩거리면서 욕을 했다. 윗집 또는 윗윗집은 대체 왜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남의 집에 피해를 주지? 왜 자기만 생각하지? 뭐 이런 식으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마구 탓했다.
그러다 문득 마음이 좀 차분해지면서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나야 혼자 살고 집에만 있으니 세탁기를 2주에 한 번씩만 돌리면 된다. 하지만 다른 집들은 아이가 있거나 옷이 금방 더러워지는 일을 하거나 가족이 많다거나 하는 이유로 세탁기를 자주 사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근처 상가의 코인 세탁기를 쓰러 갈 시간을 못 낼 만큼 바쁠 수도 있고. 어쨌든 나한테 피해를 주려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게 곰곰이 남의 사정을 생각해보니 무턱대고 욕을 한 게 미안해졌다. 나 또한 평소에 다른 집에 폐 안 끼치는 좋은 이웃은 아니었으니까. 우선은 고양이가 울어대고, 새벽에 라면 끓이는 소리도 냈으며, 흥에 겨우면 노래를 틀어놓고 춤도 췄다(물론 발소리가 나지 않게 상체만 흔들었다)
이렇게 나의 잘못에 대해 먼저 반성하다 보니 윗집에게 느꼈던 화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덕분에 평소처럼 밝은 목소리로 남자친구에게 모닝콜을 할 수 있었다.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는 앞으로도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남을 탓하기 전에 내 잘못부터 생각해보겠다고 다짐했다.
...로 일기가 끝나면 좋았겠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아침 8시쯤 관리사무소에서 실내 방송을 했다. 세탁기 사용으로 피해를 입는 세대가 늘고 있다고, 당분간 세탁기 사용을 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집 말고도 베란다가 엉망이 된 집이 많은 것 같았다.
그러나 윗집은 실내 방송을 안 듣는 게 분명했다. 또 세탁기를 사용했다. 그것도 해가 쨍쨍한 한낮이 아니라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오후 6시에 말이다.
베란다에 다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얼음 기둥이 무서운 속도로 쑥쑥 자랐다. 거의 대나무 죽순이 커가는 수준이다. 나는 참다 못해 관리사무소에 전화하기로 결심했다. 윗집을 직접 찾아가는 건 무섭기 때문이다.
나는 가뜩이나 겁쟁이인데 상상력까지 풍부하다. 풍부한 상상력은 글쓰는 데에 도움이 되지만, 겁쟁이에게는 해만 된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최악의 상황을 마음껏 상상해버리고 만다.
윗집을 찾아가는 일도 그랬다. 층간소음으로 칼부림까지 벌어지는 세상이다. 어쩌면 세탁기 문제로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실은 관리사무소에 전화하는 것도 꽤 겁이 나는 일이라 머뭇거렸다. 마치 이런 내 심정을 알기라도 하듯 또 실내 방송이 나왔다. 지금 세탁기 쓰는 세대는 당장 세탁기 사용을 중지하라고, 1층이 물바다가 됐다고 이걸 책임질 수 있겠냐고 했다(너희 집을 피바다로 만들겠다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살벌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윗집은 배짱이 두둑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관리사무소에서 다시 방송을 했다. 내용은 위와 동일했다. 하지만 윗집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관리사무소에서는 또다시 방송을 했다. 이번에는 내용이 확 달라졌다. 피해 입은 세대들이 피해 보상을 청구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방송을 할 시간에 차라리 세탁기 돌리는 세대를 찾아가서 멈추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계속 방송만 한다. 물론 윗집은 끝까지 세탁기를 끄지 않았다. 중간에 조용해지기에 껐나 했는데 불림 기능 타임이라 잠깐 쉰 것 같다...
이걸 지금 실시간으로 겪고 있는데 이제는 화도 나지 않고 그저 황당할 뿐이다. 이놈의 아파트.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내년엔 반드시 이 아파트에서 탈출하고 말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