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oscarpark 입니다.
간결한 문체와 짧은 분량의 미니멀리즘 소설의 정점에 있었던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 생각나 예전 기록을 바탕으로 그 감상을 정리해봅니다.
카버의 글을 접하면 생각이 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작가에게 내내 끌려다니는 불편함을 토로하게 만듭니다.
책 마지막을 덮고 시간이 지날 수록 뭔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 옵니다. 마치 단단하게 뭉친 큰 알약을 물도 없이 삼켰고 그게 목에 딱 걸렸는데 조금씩 녹아내리는 느낌입니다.
여운이 많이 남습니다. 골몰하다 '메시지가 이 것이었나' 언뜻 생각이 들면, 그제서야 그 단편을 이루는 얼기설기 엉킨 것이 풀리는 느낌입니다.
카버의 작품 전반은 "대성당" 역자인 김연수의 지적처럼 실낙원과 바벨탑의 붕괴를 깔아두고 있습니다. 행복했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혹은 어떤 사건으로 고된 시기에 마주하게됩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고 싶으나 들어주지 않거나 혹은 상대의 대화 시도를 흘려듣습니다. 그게 귀지에 막힌 귀라던지, 잘린 귀, 혹은 맹인에게 던지는 저렴한 농으로 나타납니다.
김연수의 해설에 덧붙이자면 그로인해 등장 인물들은 탄탈로스와 같은 고통에 빠져있지만 카버는 독자에게 그 고통을 제대로 전달해주지 않습니다. 그냥 머리통을 쎄게 쥐어박는다든지, 허둥거리며 물건을 쏟아 버리는 등의 모습으로 묘사할 뿐입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과 카버 그리고 독자인 나, 삼자 모두 대화가 가로막혀있기 때문입니다.
카버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탄탈로스와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대화를 시작하고 유지하란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더 늦기전에.
그저 귓가를 맴돌다 흘려버리는 대화가 아닌 맘을 열고 귀 기울여 듣는 대화를 말입니다.
서로 둘만의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익힐 적절한 시간을 흘려버리고 대화를 기피한다면, 뭔가 말하기 위해 온 아내를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며 흘려듣다, 귀지를 제거한 후 말을 건내려 했지만 황급히 가버리는 아내 뒷 모습에 귀를 기울이는 남자의 이야기나, 깨달음에 집으로 되돌아 왔지만 서랍장에 있는 물건을 그저 쏟기만 하거나, 또는 기차에 올라선 순간 이야기의 주인공에서 그저 배경으로 전락하는 미스 덴트와 같이, 우리는 고립으로 고통받는 개인으로 남게 된다는 주장이 아닐까 합니다.
반면에 적절한 시각에 적절한 노력으로 대화를 시작하면 테이블에 올려진 향긋한 케익으로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든지, 혹은 맹인에게 보는 방법을 배우며 경이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된다는 결말이 카버가 진실로 자기가 그렇게 되길 원했던, 또한 들려주고픈 메시지라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공감대를 형성하는 대화는 어려운 것입니다. 일방이 대화를 바란다고해서 상대가 응하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상대가 대화를 원하게 되었을 때 대화를 하고자하는 바램이 지속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 노력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어려운 것입니다. 머리 속 까지 치민 화를 억누르고 제빵사의 말에 귀 기울이고 차려진 테이블에 앉는다든지 혹은 도화지와 연필을 쥐고선 지시에 따라 불편한 맘을 접고서 두 눈을 감는다든지. 이런 노력과 시도 후에야 서로 마음이 연결되고 공감이 형성되어 무너진 바벨탑의 현실과 실낙원의 아픔에서 위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자연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대화를, 관계를 혹은 그 무엇이라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시작할 마음을 분명히 먹어야하고,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것도 적절한 시각에. 상대는 물건이 아니기에 내가 시작하기까지 언제까지나 기다려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혹 기다린다해도 이미 감정은 내 기대와 다른 곳을 향해 치닫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바램이 외면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믿음으로 억누르고 안테나를 맞추고 입을 떼고 귀를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